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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이 대사] 영화 '레버넌트'…"복수는 신의 일이지"

[이 영화, 이 대사] 영화 '레버넌트'…"복수는 신의 일이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묘한 영화다. 영화는 꽤 묵직한 감동을 담고 있다. 러닝타임도 156분이나 된다. 그런데 “어떤 영화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딱히 대답을 찾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우선 이렇다 할 극적인 스토리가 없다. 대사마저 매우 적다. 상당 부분이 주인공 휴 글래스의 거친 숨소리로만 채워진다.

굳이 ‘스토리’를 얘기하자면, ‘레버넌트’는 '복수'를 그린 영화다. 하지만, 실제 복수 장면에 할애된 시간은 후반부 잠깐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눈밭에 버려진 글래스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결국 제목을 넘어서는 설명을 찾기 어렵다.

“당신이 보기엔 이 영화는 어떤 영화냐”고 다른 이들에게 몇 차례 물어보기도 했다. 별 신통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대부분 비슷한 답을 내놨는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개고생'하는 영화”라고들 했다. 맞는 말이다. 사실 이 영화는 디캐프리오의, 디캐프리오에 의한, 디캐프리오를 위한 영화다.

'완벽한 외모'라는 짐을 떨쳐내기 위한 배우 디캐프리오의 투쟁은 눈물겹다. 156분 러닝타임 내내 눈밭을 기고,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 속에 뛰어들고, 피가 뚝뚝 듣는 날고기를 예사로 씹어 먹는다. 디캐프리오가 이 영화로 골든 글로브를 거머쥔 건 절대 행운이 아니다.

하지만, 디캐프리오의 열연에 감탄만 하다 나온다면 이 영화를 껍데기만 본 것이다. 글래스의 처절한 생존기 뒤에 숨어있는 묵직한 메시지들을 놓친 것이기 때문이다. 혹독한 대자연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투쟁. 백인으로 대표되는 문명과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대변되는 야만 사이의 갈등. 무엇보다, '복수'라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용서'라는 신적 가치의 충돌 말이다.

갈갈이 찢긴 몸으로 눈밭을 헤매던 글래스는 우연히 아메리카 원주민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이 원주민은 많은 면에서 글래스를 닮았다. 그 역시 가족을 모두 잃고 혈혈단신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몰살한 이들은 믿었던 수족들이었다.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면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처지도 똑같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두 사람의 투쟁은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글래스의 생존은 배신한 동료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서다. 반면 원주민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 다른 원주민들을 찾아 남쪽으로 가는 길이다.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의 신념이 너무 확고해 보인다. 그는 글래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슴은 찢어지지만, 복수는 신의 일이지.”

원주민의 이 한 마디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글래스의 입을 통해 정교하게 반복된다. 글래스는 사투 끝에 마침내 배신한 동료 피츠제럴드를 만나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의 목숨을 뺏는 대신 그의 몸을 강물에 흘려 놓아 보낸다. 그러면서 이런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래. 복수는 내 손에 달린 일이 아니야. 신의 일이지.”
사실, 글래스의 거친 숨소리에 따라 2시간 넘게 같이 숨을 몰아쉬던 관객들에게 이 대사는 적잖이 생뚱맞다. 오로지 복수만을 향해 달려온 처절한 여정의 종착역에 드디어 섰다. 그렇게도 염원하던 바로 그 순간이다. 긴장감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그때, 글래스가 돌연 복수의 화신에서 용서의 아이콘으로 급변한 것이다.

“가슴이 찢어지지만”같은 변명조차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을 관조하는듯한 눈빛뿐이다. 불과 몇 초 전까지 뜨거운 피를 뚝뚝 흘리던 글래스가 갑자기 쿨해도 너무 쿨하다. 감독은 아무 설명도 내놓지 않는다. 당혹감에 휩싸인 관객들은 직접 설명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이 장면이 적지 않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글래스가 ‘결정적 순간’에 피츠제럴드를 용서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글래스가 마지막 순간에 복수를 포기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 글래스는 피츠제럴드를 용서하지도, 복수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단지, 마지막 피를 제 손에 묻히지 않았을 뿐이다.

글래스가 피츠제럴드를 놓아 보낸 건 강 건너편에 서 있는 원주민 무리를 발견한 직후다. 영화 내내 백인들을 공격하던 무리다. 여러 차례 글래스의 목숨도 노렸던 이들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글래스는 피츠제럴드를 놓아준 게 아니다. 백인들을 추격하는 원주민 무리를 향해 흘러가는 물살 위로 그를 떠민 것이다.

글래스는 입으로는 “신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손은 여전히 “복수는 나의 것”을 외치고 있다. 글래스의 손과 입이 빚어내는 모순은 영화가 품고 있는 모든 갈등들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우선, 원주민과 백인으로 상징되는 야만과 문명의 충돌을 끄집어낸다. 이 충돌은 곧 자연과 인간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대자연과 인간의 투쟁을 그린 이 영화에서 원주민들은 자연의 일부다. 그들이 백인들과 대립하는 건 백인들이 그들에게서 “땅을 빼앗고 짐승의 씨를 말린” 탓이다. 원주민들은 신이 내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고 신의 영역 속에 있다. 복수도 예외가 아니다.

백인들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정복하려 든다. 이들에게 자연은 어떻게든 이기고 극복해서 관리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다. 입으로는 신을 부르짖지만, 그들에겐 힘이 곧 신이다. 신은 총, 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복수는 신의 것이 아니다. 철저히 “나의 것”이다.

영화 속에서 글래스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서 있다. 피부색은 백인이지만 원주민 아내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고 원주민들과 어울려 함께 살았다. 그러다 미군의 공격으로 아내를 잃었다. 아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미군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글래스조차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의 뿌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잠시 야만의 세계에 섞여 살았으나, 그는 애당초 문명에 적을 둔 사람이다. “복수는 신의 일”이라고 말하는 글래스의 얼굴에서 공허하게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가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 준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글래스의 멍한 시선이 닿아 있을 어디쯤에서, 생뚱맞았던 앞서 그 장면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천천히 되짚다 보니, 글래스의 복수를 완성하는 ‘신’의 손이 다름 아닌 원주민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감독이 불친절했던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뜬금없고 앞뒤 안 맞는 글래스의 변신이야말로 ‘문명’의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터무니없는 오만에 대한 더 없이 정확하고 신랄한 묘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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