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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부를 때만 대한의 아들'? 軍에서 얻은 건 난치병 뿐

부대 체육대회에서 다친 뒤 CRPS 진단…평생 고통 안고 살아야

[취재파일] '부를 때만 대한의 아들'? 軍에서 얻은 건 난치병 뿐
● “군대에서 아프면 서럽다”

군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가 “군대에서 아프면 서럽다”는 말입니다. 집 떠나서 아프면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혼자 끙끙 앓아야 되니 자기만 손해라는 얘기였지요. 저도 일병 때 발을 다쳐 잠시 깁스를 하고 몇 주 동안 입실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서러웠냐고요?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의무실에서 생활하다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혹은 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마주치는 선임들의 눈초리. “언제 복귀하냐?” “엄살 아니야?” “올라오면 보자” 같은, 가슴을 후벼 파는 따가운 말들. 나중에는 그게 싫어서 아예 의무실에서 나오지 않고 굶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결국 다 낫기도 전에 복귀해 퉁퉁 부은 발을 전투화에 구겨 넣으며 “괜찮습니다” 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던 그 시절.

서럽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군 생활을 하다가 평생 따라오는 장애와 고통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제자 8뉴스에서 보도했던 22살 황 모 씨가 그런 경우입니다.
▶ 軍서 축구하다 선수생명 끝…전역 시키면 끝?
● 부대 체육대회에서 인대 파열…수술 뒤에도 계속된 통증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축구선수로 뛰던 황 씨는 재작년인 2014년 7월 친구와 함께 육군에 동반 입대했습니다. 서울의 한 부대에 자대배치를 받은 뒤, 이등병이던 그 해 10월 부대장 주최 체육대회에 축구 선수로 출전했습니다.

비록 이등병이지만 ‘선출’(선수 출신)답게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당연히 상대 팀의 집중 견제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상대 선수의 태클에 쓰러진 황 씨는 결국 부축을 받고 운동장 밖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군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뼈에는 이상이 없다면서 깁스를 해줬습니다. 한 달 뒤에 깁스를 풀었는데 전혀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다시 병원에 가서 MRI를 찍으니 그제서야 왼쪽 발목 인대가 파열됐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당장 수술날짜를 받고 그 해 12월 수도병원에서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수술을 받고 회복기간을 거쳐 부대에 복귀했는데 통증이 가라앉지를 않는 겁니다. 수술 부위는 계속 부어올랐고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불침번 근무를 서는데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발이 아파 말도 못하고 엉엉 울었습니다.

입실과 외진을 반복하다가 군의관으로부터 다시 입원하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휘관이던 중대장은 입원 대신 생활관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사이 증상은 계속 나빠져갔고, 황 씨는 결국 군의관의 판단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 CRPS(복합부위 통증증후군) 진단…‘평생 따라가는 고통’

그리고 황 씨는 국군수도병원에서 ‘CRPS'(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진단을 받게 됩니다. CRPS는 ’복합부위 통증증후군‘의 약자로, ‘악마의 통증’으로 유명한 병입니다. 외상을 입은 뒤 다친 부위의 미세 혈관이나 자율 신경 등이 손상돼 계속 부어오르거나 괴사되기도 하는 ‘희귀성 난치 질환’입니다.

정확한 발병 원인과 기전이 완벽하게 파악되지 않은 매우 드문 질환인데, ‘산들바람만 불어도 고통스럽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통증을 유발합니다. 취재과정에서 자문을 구한 김대희 인천성모병원 응급의학 전문의에 따르면, 통증 정도를 1에서 10까지 구분한다고 하면 CRPS의 경우 9에서 10 정도의 통증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산모가 출산할 때 느끼는 고통을 10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CRPS가 정말 무서운 이유는 ‘완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드물게 호전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CRPS의 치료는 치료가 아니라 고통을 줄이는 ‘관리’의 개념으로 이뤄집니다. 결국 출산에 버금가는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황 씨가 처음 병을 진단받고 의사에게 들었던 말도, ‘낫는 병이 아니니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직접 만난 황 씨의 왼 발은 마치 코끼리 발처럼 부풀어 있었습니다. 부어오르면서 살이 터져 생긴 각질과 흉터가 흉측하게 발을 뒤덮었습니다. 병상 곁에는 ‘왼쪽다리 절대 만지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붙어 있고, 왼쪽 발목에는 이 아래로는 만지면 안 된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볼펜으로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황 씨는 자신이 느끼는 통증을 “칼이 막 베는 듯하고 살가죽이 찢기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촬영을 위해 잠시 휠체어를 타고 나간 복도에 바람이 불자 너무 아프다면서 허벅지를 부여잡고 한쪽 발을 덜덜 떠는 황 씨를, 정말 보기가 괴롭고 미안했습니다.

● 부대에서는 전역 조치…전역시키면 끝?

진단 뒤 계속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부대로 복귀한 황 씨는 ‘전역 조치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군의관에게 듣게 됩니다. 신체등급이 1등급에서 4등급으로 내려가 보충역(공익)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황 씨는 계속 군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정상적인 군 생활이 불가능하더라도 계속 군에서 치료를 받고 만기 제대하기를 원한 겁니다. 군인 신분일 경우 계속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아닐 경우 전역 후 6개월까지만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스스로 치료비를 부담해야 합니다.

하지만 본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황 씨는 지난해 8월, ‘전역이 되었으니 가족들을 불러 집에 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것도 그 당일에서야 갑작스레 이뤄진 통보였습니다. 원하지 않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후 집과 병원을 전전하던 황 씨는 현재 민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군부대 측이 보인 태도와 대처가 문제였습니다. 전역이 됐지만 상태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으니 차후 적절한 보상과 조치가 따라야 마땅합니다.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부대에서 공무 중 부상(공무) 여부를 인정받은 뒤 국가보훈처에 공상자 신청을 해야 합니다.

보훈처에서 인정을 해야만 치료비를 일부 지원받을 수 있고 이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황 씨도 부대에 요청해 공무상병인증서를 받기는 받았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엉터리였습니다. 부대에서 발급한 인증서에는 다친 날짜도 다르고 주민등록번호도 다르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공무 중에 다쳤다는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똑같이 축구를 해서 다쳤더라도 여가 시간에 병사들끼리 축구를 하다 다친 것과 부대 체육대회에서 다친 것은 엄연히 다르게 구분됩니다. 부대장이 주관하는 체육대회에서 다쳤다면 전투 중에 다친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지만, 부대에서 발급한 인증서에는 그냥 ‘연병장에서 축구를 하던 도중 상대편과 몸싸움을 하다가 충돌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문을 맡아준 군인권센터 변호사와 임태훈 소장은 엄연히 ‘잘못된 기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보훈처에서 공상 인정을 받고 국가유공자 소송까지 가기 위해서는 부대 체육대회라는 공무 수행중에 다쳤다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수정을 요구했지만, 황 씨는 몇 달이 지나도록 수정된 인증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보훈처에 인증서를 제출하는 다음 절차도 밟지 못했습니다. 부대에 문의하니 ‘인사담당자와 지휘관이 바뀌었고, 이제는 부대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본인이 병원에 가서 떼라’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황 씨는 지금 “버림받은 심정”이라고 말합니다. 동반입대를 선택할 정도로 처음에는 군대에서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고, 군에 애정도 많았다고 합니다. 잘 풀리지 않았던 선수생활을 잠시 접고 입대할 때는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1년 1개월 동안의 군 생활에서 얻은 건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는 통증과 마음의 상처뿐이었습니다.
● 軍 주장, “할 수 있는 조치 다 했다”

군부대 측은 황 씨의 발병 이후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했다는 입장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입실, 외진 등을 받을 수 있게 최대한 배려를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수술 이후에도 통증이 심해져 입원하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당시 지휘관이 입원 조치를 시키지 않고 부대에서 대기하라고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부대 측은 ‘생활관에 대기나 입실이나 일과를 하지 않는 것은 같기 때문에 똑같은 조치’라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사병으로 군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당시 일병이었던 황 씨는 그저 앉아있거나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눈칫밥을 먹고 아무 것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황 씨의 상담 및 진료 기록에도 ‘무력감이 심해 우울증을 느끼고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장교와 사병의 시각차가 있다고 치더라도, 병원이나 의무실에서 치료를 포함한 ‘관리’를 받는 것과 부대에서 대기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라면 더 그렇습니다. 두 조치가 같다고 판단했다면, 해당 병사가 그저 엄살을 피운다고 생각했거나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몰랐다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 공무상병 인증서의 경우 행정상 착오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공상으로 처리를 했으니 이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공상 처리 내용은 기자도 직접 확인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부대에서 공상을 인정하는 것과 보훈처에서 처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를뿐더러, 향후 보상 절차를 위해서는 그 내용의 적절성 여부가 중요합니다.

더구나 최초 작성된 공상 인증서는 보훈처 뿐 아니라 까다로운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는 기초자료가 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취재진이 자문을 구한 전문 변호사들은 해당 내용에 민원을 제기해 수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듯이 부대 측은 이런 절차와 관련 내용을 당사자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부대와 지휘관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필 CRPS라는 희귀한 질환이 발병한 것이 부대의 책임은 아닙니다. 여러 병사를 관리해야 하는 지휘관의 고충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결국 한 병사가 군복무 도중 입은 부상으로 희귀성 난치병을 앓게 됐고,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일 겁니다.

부대에서는 전역시키고 끝이었습니다. 황 씨가 민간 병원에 입원한 이후, 황 씨와 보호자인 아버지는 전화 한 통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황 씨가 홀로 입원해 끙끙 앓는 동안 그 누구도 병원을 찾지 않았습니다.

기사가 보도된 뒤 한 포털사이트에서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입니다. ‘부를 때는 대한의 아들, 죽거나 다치면 니네 집 아들’. 21세기 군대에서도 여전히 이런 피해, 끊이지 않는 건 누구의 잘못입니까?

**덧붙이는 말

황 씨의 치료비는 현재 경북 의성에서 벼농사와 가지 농사를 하는 아버지가 부담하고 있습니다. 일산의 한 대학병원에 보름동안 입원해 나온 치료비만 2백만 원이 넘었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까지 모두 네 명의 형제자매를 홀로 키우고 있는 황 씨의 아버지는 “자식이 저렇게 돼 가슴이 찢어지는데 평생 치료비를 생각하면 막막하다”고 합니다.

치료비 부담 때문에 황 씨는 오늘(14일) 서울 강서구의 다른 병원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국가유공자 소송과 보훈처 공상인정을 위한 법률 자문은 군인권센터에서 지원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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