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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서울중앙지검장, 법원에 '선전포고'한 이유는?

[취재파일] 서울중앙지검장, 법원에 '선전포고'한 이유는?
● 명장의 3대 조건

'울리 슈틸리케의 매직'이라고 부릅니다. 슈틸리케 감독이 뽑는 선수들마다 A매치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축구팬들 사이에서 생긴 말입니다. 2부리그에서 뛰던 무명의 이정협 선수가 지난해 호주 아시안컵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습니다. 의외의 발탁이라는 말도 많이 나왔습니다. 뽑힌 선수는 얼마나 위축됐을까요?

슈틸리케 감독이 이정협 선수에게 한 마디 했다고 하죠? "내가 책임질테니 그라운드에서 마음껏 뛰라"고. 이정협 선수는 골로 응답했고 이제는 부동의 A대표팀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신예 권창훈 선수나 황의조 선수의 가능성도 엿봤고 지동원 선수의 부활도 이끌어냈습니다. '찍으면 터지는' 슈틸리케 매직으로  A대표팀은 재작년 브라질월드컵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선수들의 부담감을 감독의 책임으로 치환하는 능력. 자신을 희생해 팀의 능력치를 극대화시키는 능력은 유능한 리더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팀 스포츠에서 내부 결집력을 끌어올리는 건 감독의 또 다른 중요한 역량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은 외부의 적을 이용해 내부의 단합을 끌어내는 방식입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오대영'이라는 별명으로 언론의 지탄을 받았고 선수들의 무기력한 경기력도 도마위에 올랐었죠. '심리전의 대가' 답게 히딩크 감독은 언론을 외부의 적으로 만들어 선수들의 단합을 이끌어냈다는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리더는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죠. 리더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면 선수들의 충성심도 높아집니다. 성과는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뭉치면 살지만 생각보다 조직을 뭉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국면전환용 계기를 만들어 내야하는데 카드를 빼들 명분과 타이밍을 찾아내는 것도 좋은 리더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 '법원에 선전포고'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돌연 서울고검 기자실을 찾았습니다. 새로 부임한 검사장이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의 배임죄 무죄 판결에 대한 검찰 입장을 발표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죄판결이 이례적인 것도 아닙니다. 보통 검찰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짧은 답변을 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카메라 촬영도 허용한다고 밝혔습니다. 검사장이 작심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검사장은 법원을 상대로 마치 선전포고라도 하듯 단호한 어조로 법원의 판결을 비판했습니다. 법원의 무죄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문을 일부 발췌했습니다.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은 석유개발회사 하베스트의 정유공장 인수 당시 나랏돈 5천500억 원의 손실을 입혔고, 결국 1조 3천억 원이 넘는 천문학적 손실이 났습니다. 국민이 낸 세금이므로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았습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위와 같은 손실이 발생한 사실이 인정되었는데, 무리한 기소이고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중으로 날아간 천문학적 규모의 세금은 누가 책임집니까?"

"경영평가 점수 잘 받으려고 나랏돈을 아무렇게나 쓰고, 사후에는 '경영판단'이었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면 회사 경영을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무런 실사 없이 3일 만에 '묻지마식' 계약을 하고 이사회에 허위 보고하여 1조 원이 넘는 손해를 입혔는데, 이 이상으로 무엇이 더 있어야 배임이 될까요."

"판결처럼 경영판단을 지나치게 폭넓게 해석하기 시작하면 책임자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며 그나마 유일하게 존재하는 검찰수사를 통한 사후통제를 질식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검찰은 단호하게 항소하여 판결의 부당성을 다툴 것입니다."

사실 법원 판결에 대한 검사들의 불만은 사실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검사들이 법원을 상대로 노골적인 비판보다는 정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자칫 지나친 감정싸움이 법원과 검찰의 갈등으로 표면화 된다고 해도 검찰이 얻을 것은 별로 없습니다. 법조 3륜 가운데 법원이 '갑'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책임진다 나를 따르라

검사장과 검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조직내부의 서열을 떠나서 말입니다. 검사장은 수사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수사하는 일선 검사들을 관리하는 선수출신의 감독일 뿐입니다. 검사장의 화려한 수사경력이 검사들에게 귀감이 될 수도 있고 영감을 줄 수도 있지만 감독의 화려한 이력은 선수들을 주눅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양날의 검인 셈입니다. 명선수 출신이 항상 명감독이 되지않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검사장이 단순히 법원의 판결에 기분이 나빠서 즉흥적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검사장의 첫 번째 노림수는 '책임의 치환'입니다. 인사고과로 따진다면 무죄 판결은 검사들에겐 치명적입니다. 열심히 수사했는데 법원이 '0점'을 준 거나 다름 없습니다. 검찰총장과 검사장 얼굴에 먹칠한 셈입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겠지만 차장검사나 부장검사가 '갑'인 법원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검사들의 전쟁터는 언론플레이가 아니라 법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선 검사들의 속은 타들어갑니다.

검사장의 도발은 일선 검사들의 부담감을 자신의 책임으로 치환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수사의 정당성을 강조한 검사장의 기자회견은 무죄판결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질테니 유무죄를 끝까지 다투어보자는 의지의 발현입니다.  정치적이지만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 검찰과 법원, '선'과 '악'의 구도…그리고 기막힌 타이밍

이 검사장은 법원을 검찰의 공적으로 규정하는 전통적인 방식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것도 정파를 막론하고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수사할 수 있었던 '자원외교 비리' 사건을 계기로 삼았습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국민혈세가 증발한 사건. 국민적 분노를 등에업은 명분있는 수사에 명분없는 무죄판결이라는 구도는 선과 악의 구도를 명확하게 규정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외부의 적으로 내부를 규합하겠다는 감독의 전략인 셈입니다. 수요일이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새로운 진용으로 출발을 할 겁니다. 새로운 수사를 앞두고 새로운 구성원에게 가장 큰 각성효과를 기대했다면 기자회견도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이뤄진 셈입니다.

물론 법원은 가슴을 칠 일입니다. 법과 법감정의 괴리로 법원이 손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난주 홈플러스 '개인정보 장사' 판결도 그렇습니다. 잘못된 건 알지만 개인정보보호법상 형사처벌을 할 수는 없다는 취지라는 건데 여론은 법원이 기업의 개인정보 장사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법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강영원 석유공사 전 사장의 경우도 경영과 판단 과정에 잘못은 있지만 '배임죄' 적용이 어렵다는 게 판결의 취지입니다. 그런데 이영렬 검사장의 기자회견으로 법원은 또 다시 '독박'을 쓰게 됐습니다. 법정이 아닌 여론전에서는 검찰 쪽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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