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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끊이지 않는 美 언론 스캔들…진실 외면도 조작·표절만큼 나쁘다

[취재파일] 끊이지 않는 美 언론 스캔들…진실 외면도 조작·표절만큼 나쁘다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제이슨 블레어(Jayson Blair)는 조작과 표절의 대명사다. 2003년 5월11일 뉴욕타임스는 스스로 152년 역사상 최대 오점으로 표현한 기사를 1면에 싣는다. 제목은 Times Reporter Who Resigned Leaves Long Trail of Deception. 당시 27세, 잘 나가던 기자 블레어의 사기극이 전모를 드러낸 순간이다.

블레어는 메릴랜드, 웨스트버지니아, 텍사스 등 다른 주에 직접 가서 인터뷰하고 취재한 뒤 기사를 보낸 것처럼 편집진을 속였다. 실제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뉴욕에서 머물렀다. 그가 즐겨 다룬 소재는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이를테면 이라크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병실에 누워 있는 병사의 이야기 같은) 휴먼 스토리다. 가공의 인물들, 절묘하지만 꾸며낸 상황이 기사를 장식했다. 인터뷰이의 절절한 멘트는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문이었다.
블레어의 기사 중 사실인 부분은 대부분 표절이었다. 그는 AP, 워싱턴포스트 등은 물론, 지역신문까지 짜깁기해서 스토리를 완성하고, 이른바 ‘초’를 치는데 능했다. 뛰어난 검색 능력이 그의 표절을 뒷받침했다. 사기극의 꼬리가 잡힌 것도 샌안토니오 지역신문의 표절 주장 때문이었다.

일부 뉴욕타임스 기자들은 최소한 1년 전부터 블레어로 하여금 더 이상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간부들에게 주장했다. 그의 잦은 실수와 기사의 부정확성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에 번번이 묵살됐다. 사교적이고 쾌활한데다 사내 정치에 능했던 블레어의 캐릭터가 한 몫을 했다.

점증하는 사내의 의심 때문에 잠시 한직으로 밀려났던 블레어를 다시 뉴욕타임스 1면에 등장시킨 것은 2002년 미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워싱턴 스나이퍼(저격수) 사건이다. 워싱턴DC 일대 평범한 시민들을 상대로 벌어진 무차별 저격 사건. 이 지역 출신 블레어가 특별취재팀에 투입됐다. 그의 특기,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한 일련의 보도는 큰 반향(강한 반박을 포함해서)을 불렀다. 하지만 결국 존재하지 않는 사실, 가공의 소식통으로 점철된 기사임이 밝혀졌다.

기사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정황은 이전부터 넘쳤다. 워싱턴 스나이퍼 사건을 다룬 블레어의 기사들만 해도 6개월 동안, 6개 주, 20개 도시에서 취재된 것으로 표현됐다. 그런데도 블레어가 회사에 청구한 항공, 렌터카, 호텔 비용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이 기간 청구된 것은 블레어의 ‘이중 존재’에 없어서는 안 될 휴대전화 요금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심스러운 정황을 아무도 종합하거나 주목하지 않았다. 사내 커뮤니케이션은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블레어는 22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재닛 쿠크(Janet Cooke)의 쌍둥이다. 쿠크는 1980년 마약에 중독된 8살 아동을 다룬 ‘지미의 세계(Jimmy's World)’로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8살 지미의 팔에 생긴 ‘주근깨 같은’ 마약 주사 바늘 자국까지 생생히 묘사함으로써 미국 사회를 경악시켰다. 하지만 지미는 가공의 인물임이 드러났고 쿠크는 퓰리처상을 반납해야 했다.

학위를 속였고, 익명의 소식통을 애용했다는 점까지 블레어와 쿠크는 판박이었다. 언론사 내의 비민주성과 소통의 단절 역시 빼다 박았다. 편집 간부들은 블레어와 쿠크가 애용한 소위 ‘익명의 소식통’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다. 아니,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블레어의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워싱턴포스트의 일부 기자들은 ‘지미의 세계’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에 빛나는 밥 우드워드 당시 부국장은 이를 무시했다. 뿐만 아니라  퓰리처상 추천을 강행했다. 미국 전문기자협회 윤리 강령-모든 정보의 출처를 확인해야 한다. 대중도 정보 출처의 신뢰성에 대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가질 권리가 있다(Identify sources whenever feasible. The public is entitled to as much information as possible on sources' reliability)-을 무시한 참사였다.

라틴계 최초의 로스엔젤레스 시장 비야라이고사. 그는 지난 2007년 스페인어 방송 ‘텔레문도’의 앵커우먼 살리나스와의 불륜을 마지못해 고백했다. 세간의 이목은 소위 잘 나가는 정치인과 미모의 앵커가 벌인 외도에 쏠렸다.

이면에는 언론의 비윤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살리나스는 비야라이고사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비야라이고사가 부부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앞장서 보도한 것이다. “실제하든, 인지된 것이든 이익의 충돌을 피하고(Avoid conflicts of interest, real or perceived) 신뢰성이나 진실성을 훼손하는 어떤 관계나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Remain free of associations and activities that may compromise integrity or damage credibility)”는 윤리강령을 위반한 것이다.

기본을 무시한 언론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다. 미국의 대중문화지 롤링스톤은 지난 2014년 11월 버지니아 대학에서 일어난(것으로 알려진) 윤간 사건을 다뤘다. 사브리나 어들리(Sabrina Rubin Erdely) 기자가 쓴 기사의 제목은 'A rape in campus', 명문 버지니아 대학의 한 남학생 사교클럽 멤버 7명이 ‘재키’라는 여학생을 윤간했다는(또는 윤간했다고 주장한) 이야기였다.

지성의 전당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윤간 사건. 호들갑스러운 대중의 호기심과 영합하며 주목을 끌었다. 버지니아주 샬럿츠빌 경찰이 수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롤링스톤의 기사 어디에도 주장과 떠도는 소문만 있을 뿐, ‘강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거나 객관적인 증언이 없었다. 때문에 경찰 조사는 난항을 겪었다. 결국 수사 결과는 증거 없음, 롤링스톤은 기사를 철회하고 사과했다.

롤링스톤의 자체 조사 결과 피해자(라고 알려진) 여학생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어들리 기자는 혐의를 받고 있는 남학생들은 물론, ‘재키’의 주변 인물들도 제대로 인터뷰하지 않았다. 롤링스톤은 자신들의 편집 프로세스에 대한 반성문을 게재했다. 버지니아 대학과 남학생 사교클럽 멤버들은 롤링스톤의 명예훼손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콜롬비아대학 저널리즘 스쿨도 이 사건을 조사, 연구했다. 저널리즘 측면에서 세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지적했다. 롤링스톤의 자체 조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사 작성과 게재의 기본에 관한 것이다.

우선 어들리 기자는 ‘재키’의 가장 친한(윤간 직후 재키가 도움을 청했다고 알려진) 친구 3명과 접촉하지도 않았다. 이 셋은 나중에 그들이 했던(것으로 알려진) 윤간 사건에 대한 진술을 부인했다. 어들리는 ‘재키’를 윤간한(것으로 알려진) 남학생들을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롤링스톤은 윤간한(것으로 알려진) 남학생들이 속한 사교클럽에 적절한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비극적인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하거나 사진을 사용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협회 강령을 따른 듯 보였지만 “모든 출처로부터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해야 한다(test the accuracy of information from all sources)”는 기본은 또 무시됐다.

지난해에는 미국 NBC의 유명 앵커 브라이언 윌리엄스가 스스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취재하던 윌리엄스는 자신이 탔던 헬리콥터가 피격을 받고 불시착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피격을 받은 미군 헬리콥터는 따로 있었고, 윌리엄스가 탄 헬기는 피격 이후 현장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이미 12년 전에도 윌리엄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일부 군 관계자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경쟁 매체에 제보하거나(조용히 묻혀버렸다), 윌리엄스가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것 뿐이었다.

어쨌든 ‘전쟁을 취재하다 피격 당해 죽을 뻔했다’는 주장은 윌리엄스가 유명인사로 발돋움하는데 좋은 발판이 됐다. 2013년 데이비드 레터맨쇼 출연에서도 그의 떠벌림은 계속됐다. 지난해 뉴스를 진행하던 윌리엄스가 당시 경험을 다시 자랑삼아 얘기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군 관계자들에게 소셜미디어라는 손쉬운, 하지만 강력한 이의 제기수단이 생긴 것이다.

진실을 공개한 페이스북 글은 트위터 등을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군인들과 대중의 분노, 또 조롱을 불렀다. 윌리엄스는 나이틀리 뉴스(NBC nightly news) 앵커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태풍 카트리나, 아랍의 봄 당시 윌리엄스의 취재 및 보도도 진실성을 의심받게 됐다.

미국의 기자 양성이나 취재 시스템, 정파성의 표현 방식 등은 분명 우리와 다르다. 하지만 누구든 언제 어디서나 어떤 디바이스로든 거의 모든 기사에 접근 가능한 시대, 언론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적기관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역사적으로 가장 낮은 시대(뉴욕타임스는 이런 현상이 소셜미디어의 부상과 맞물려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더 높은 수준의 언론 윤리가 요구되는 미국의 환경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UNC 저널리즘스쿨 론다 깁슨(Rhonda Gibson) 교수가 일독을 권한 미국 전문기자협회 윤리 강령은 ‘진실을 찾아 보도한다(seek truth and report it)’, ‘피해를 최소화한다(minimize harm)’, ‘독립적으로 행동한다(act independently)’, ‘책임진다(be accountable)’, 이렇게 크게 4개 항으로 구성돼 있다.

세부 항목에는 위에 언급한 내용 외에도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일에 있어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고 용기를 갖는다(be vigilant and courageous about holding those with power accountable)’, ‘언론인과 매체의 비윤리적 관행에 침묵하지 말라(expose unethical practices of journalists and the news media)’,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높은 기준을 스스로 지켜라(abide by the same high standards to which they hold others)’ 등이 포함돼 있다.

새삼 드는 생각이 있다. 진실을 외면하려는 충동 또한 진실을 과장하거나 조작하거나 표절하려는 충동과 마찬가지로 ‘진실 추구’라는 언론의 기본 윤리를 저버린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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