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정명훈 지휘자를 떠나 보내며…

9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불어 선생님이 수업시간 때 이런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지내보니 프랑스인들은 '한국인'을 딱 2명 알더라. 한 명이 백남준, 다른 한 명이 정명훈". 당시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다 이 이야기를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명훈이란 사람이 그렇게나 유명한가?'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남짓 지난 2005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정명훈 지휘자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정명훈 씨는 그 해 1월 서울시향의 예술고문으로 영입돼, 이듬해에는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했습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50대 초반의 한국인 지휘자는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키워야겠다, 그걸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건 일평생 가지고 있었던 꿈이었다'며 이제 그 '책임을 맡을 수 있을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흐른 2015년 1월, 정명훈 감독의 신년 기자간담회가 열렸습니다. '박현정 전 시향 대표의 인권유린'을 주장하는 사무국 직원들과 박 전 대표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하고 이 과정에서 박 전 대표가 사임하는 등 시향 내분사태로 한창 시끄러웠던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박 전 대표는 당시 시향이 정 감독의 사조직화했다며 그의 전횡을 주장했고, 그 과정에서 고액 연봉 논란 등 정 감독에 대한 비난 여론도 많이 불거진 시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문화부 기자가 된 뒤 처음으로 정명훈 감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였기에 당시 기자간담회가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 한국 사회와 충돌하는 단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정 감독을 둘러싼 많은 논란들은 그의 잘잘못을 논할 문제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충돌처럼 느껴졌습니다.

정명훈 감독과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관의 '다름'이 있었고, 그 다름이 '불화'를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관련 취재파일 보러가기  ▶[취재파일] 말보다 음악으로…정명훈 감독의 즉흥연주)
 
그리고 다시 1년,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정명훈 감독이 시향을 떠났습니다. 앞선 일주일은 특히나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2015년의 마지막 주말 정 감독의 부인이 박현정 전 대표에 대한 시향 직원들의 명예훼손에 관여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된 사실이 알려졌고, 이튿날 시향 이사회에서는 높아진 비난 여론 속에 정 감독 재계약 안건 처리가 보류됐습니다.

다음날 정 감독은 재계약을 최종 거부하고 10년간 몸담았던 시향을 떠나겠다고 밝혔고, 30일 예정됐던 시향의 송년음악회를 마친 뒤 프랑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정명훈 전 서울시향 예술 감독
서울시향 내분사태 이면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물증 없는 진실공방이 자주 그러하듯이 어쩌면 앞으로도 정확히는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다만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힘들었던 건 지난 일주일 간 정 감독을 둘러싼 일부 언론의 비난과 사회적 논란이 합리적이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시향 사무국 직원들이 박현정 전 대표를 성토하며 시작된 시향의 내분사태는, 박현정 전 대표가 자신을 향해 있던 손가락을 더 유명하고 화제성 있는 정 감독과 박원순 서울시장을 향해 돌려세우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박원순시정농단진상조사시민연대라는 단체는 정 감독을 횡령과 배임 혐의로 고발했고, 박 전 대표가 특정 성추행 고소 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자, 육성으로 공개됐던 당시 폭언과 막말마저 없었던 일인 양 여론은 '반전 드라마'라며 흥분했습니다. 
 
혹자는 재작년 박현정 전 대표 파문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 감독의 손을 들어줬다며 정 감독을 박 시장의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혹자는 이명박 전 시장에 의해 영입됐고 그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하연주를 한 정 감독을 이 전 대통령의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외국에서 알아주는 인물이니 잘못이 있어도 덮고 가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정 감독이 어떤 사람이든 혹시라도 이런 식의 프레임 때문에 그에게 사안의 본질에서 벗어난, 실제 받아야 할 비판보다 가혹한 마녀사냥 식 비난이 가해진다면 그건 비극이겠죠.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문화부 기자로서 제가 목격한 지난 일주일은 그런 비극이 벌어진 일주일이었습니다.
 
지난 1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아시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성장한 시향은 정 감독의 사임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았습니다. 가혹한 여론몰이 끝에 시민의 소중한 자산인 시향이 위기에 처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을 불화 속에 떠나 보내게 된 것도 유감입니다.

한 명의 서울시민으로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정 감독이 이렇게 황망하게 떠날지 몰라, 시향을 지휘하는 모습은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착각 속에, 거장의 귀한 무대를 좀더 자주 보러 가지 않았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추신: 2016년 1월 시점에서는 정명훈 지휘자를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으로 호칭하는 게 맞지만, 편의상 반복되는 '전'을 생략했습니다.   

▶ 정명훈 마지막 지휘…'진실게임' 치닫는 시향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