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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치열하게 싸웠던 시대가 그리운 이유

우리 사회가 노동 5대 법안을 다루는 방식

[취재파일] 치열하게 싸웠던 시대가 그리운 이유
▲ 1996년 12월 26일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의원들이 단독으로 새벽에 노동법 개정안 등을 기습처리하는 모습.

1996년 12월 26일, 새벽 5시 50분.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왔습니다. 의원들의 손에는 노동 관련 법안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습니다. 기업들의 노동자 정리 해고를 가능하게 하는, 이른바 ‘정리 해고 법안’이었습니다. 신한국당 국회의원 157명 가운데 3명을 제외한 154명은 이 법안을 7분 만에 통과시켰습니다.

문민정부 말기를 뜨겁게 달궜던 ‘노동법 날치기 사건’의 시작입니다. 야당은 바로 항의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여당 의원들의 명패에 검은 천을 씌웠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라며 원천 무효화를 주장했습니다. 노동계는 대규모 총파업에 나섰습니다. 30일 동안 10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IMF 여파로 노동계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습니다. 잦은 정리해고에 파업이 일상화 됐습니다. 참여 정부도 비슷한 진통을 겪었습니다. 2006년 11월 3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경호권까지 발동시키며 비정규직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비정규직으로 2년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노동계는 계약해지가 일상화될 거라며 반발했습니다. 역시 대규모 파업사태가 이어졌습니다.

노동법 개정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노동 문제는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리가 극렬히 대비되는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노동법이 공론장에 오를 때면 보수와 진보는 코피 터지게 치고 박고 싸웠습니다. 지금도 이른바 ‘노동 5대 법안’이 공론장 한 복판 위에 서있습니다. 늘 그랬듯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 법안을 두고 정말 치열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노동 5대 법안의 핵심은 기간제법과 파견제법입니다. 기업들은 비정규직으로 2년 일한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든 계약 해지하든 양자택일해야 합니다. 참여정부 때 통과시킨 비정규직 법에 따른 겁니다. 박근혜 정부는 35세 근로자가 원하면 2년을 추가 연장해주자, 그러니까 4년까지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해주자고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재취업이 힘든 30대 중반 이상 근로자에게 기회를 주면 실업 문제 해소에 비정규직 고용 안정까지 일석이조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노동계는 2년을 넘겨도 정규직 전환 안 시켜주는 편법 사례가 수두룩한데, 4년으로 늘려주는 건 편법을 되레 합리화하는 꼼수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파견법도 논란입니다.

지금은 파견 근로 허용 업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파견법은 주조, 용접같이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뿌리 사업으로 파견 근로를 확대하자는 게 핵심입니다. 노동계는 현장에 이미 사내 하청을 위장한 불법 파견 투성인데 줄이지는 못할망정 늘리는 건 처우가 열악한 파견 근로자만 늘어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부는 파견근로 확대로 일자리도 늘고, 덤으로 중소기업의 인력난까지 해결된다고 맞섭니다.

첨예합니다. 하지만, 노동 법안이 우리 사회에 공론화되는 방식은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노동계는 공식처럼 반발했지만, 노동법 담론의 시작은 광화문 폭력시위였습니다. 시위를 주동했던 한상균이라는 노동 운동가는 어느새 괴물이 돼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몇날 며칠 톱뉴스였고, 창문 사이에 비친 그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는 엄청난 메시지가 돼 신문 1면을 채워나갔습니다. 한상균을 보호해줬던 종교집단은 공권력을 부정하는 세력으로 소비됐습니다. 마치 2014년 세월호 사건 때처럼 말입니다.

사고의 진상 규명보다 유병언의 도주 행각을 중계하느라 힘을 빼고, 유대균과 박수경이 뼈 없는 치킨을 시켜먹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전국적 개망신을 줬던, 바로 그 때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노동 5대 법안에 대한 토론은 이렇게 한 노동 운동가의 일상을 해체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한상균이 구속된 뒤, 공은 국회로 넘어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노동 5대 법안을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고, 노동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을 거라며 총선 연계 전략을 폈습니다. 야당은 집안싸움에 정작 중요한 노동 5대 법안에 손을 놨습니다.

그 사이, 여당은 직권 상정 카드를 꺼냈습니다. 야당과 협상할 상황이 아니니, 여당 소속인 국회의장이 직접 나서 법안을 직권 상정해야 한다고 압박했습니다. 국회의장은 직권상정을 거부했고, 청와대와 여당은 국회의장을 공격했습니다. 노동 5대 법안의 내용을 두고 여야가 피터지게 싸워야 할 국회의 모습은 이상한 모양새로 흘렀습니다.

청와대와 여당, 야당과 노동계, 누구 말이 맞는지 이 자리에서 논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노동 5대 법안이 비정규직을 보호해줄 수 있는지, 파견직 근로자들에게 유리한지, 또 청년 일자리 창출이 얼마나 가능한지, 우리 사회가 꼼꼼히 계산해 보고 치열하게 싸우는 게 정석입니다. 그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차 정의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노동 운동가의 일상과, 국회의장과 청와대의 갈등을 통해 노동 5대 법안을 소비했습니다. 차라리, 보수와 진보가 멱살 잡고 싸웠던 그 시대의 공론장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국회 상임위 문이 망치 때문에 부서졌을지언정, 적어도 그 때는 노동법 내용을 두고 치열했습니다. 투쟁의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을 뿐 애먼 쟁점을 가져와 힘빼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일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노동 5대 법안, 그 내용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여당은 노동 5대 법안을 비롯해 쟁점 법안을 처리하지 않으면 선거구 획정도 없다며, 연계 전략을 당론으로 정했습니다. ‘선거구 획정 패키지’라는, 노동 5대 법안 접근 방식에 또 다른 쟁점이 생겼습니다. 국회 출입기자인 기자 역시, 노동 5대 법안의 내용보다, 이 연계전략과 향후 시나리오 취재에 골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집안싸움이 한창인 야당 입장은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도통 무게감이 없습니다. 노동 5대 법안은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요. 올해 총선이 끝나고, “지금까지 기자로서 너는 뭘 했는가?”라며 스스로에게 되물을 상황이 두려워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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