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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방관자적 입장에서 벗어나자"…미국 대통령의 캠페인

대학 성폭력 피해자 지원 및 사건처리 매뉴얼 개발연구 ①

[취재파일] "방관자적 입장에서 벗어나자"…미국 대통령의 캠페인
최근 읽은 어떤 텍스트보다 흥미롭고 유익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대학 성폭력 피해자 지원 및 사건처리 매뉴얼 개발 연구( 이하 매뉴얼)’다. 대학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하고 사건 처리는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그 매뉴얼을 만든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학 내 성폭력상담소 직원들을 염두에 둔 글이다.

모두 231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뭣도 모르고 인쇄를 눌렀다가 기자실에 있는 A4 용지를 절반 넘게 사용해 버렸다. (이면지로 활용하겠습니다;;) 연구 주체는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다. 여성가족부 출입 기자들에게 메일로 발송됐다. ( http://www.mogef.go.kr/korea/view/news/news03_01.jsp?func=view&currentPage=0&key_type=subject&key=대학&search_start_date=&search_end_date=&class_id=0&idx=701153)
습관적으로 좋은 구절은 밑줄 그으며 읽는 편인데, 거의 매 페이지에 손이 갔다. 배포를 위한 문서인 만큼 저작권에 대해 염려치 않고 인용하고 옮겨 적어 널리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천하려 한다. 실무자들을 위한 매뉴얼 외에, 일반인이 읽어도 유익할 부분들 위주로 보겠다.


1. 성희롱? 성폭력? 뭐가 달라?

과거 어느 술자리에서 겪은 일이다. 남자 A가 짓궂게 야한 이야기를 한다 싶더니, 여자 B에게 제3자인 내가 덩달아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불쾌한 농담을 해버렸다. B가 강한 어조로 “경찰에 성폭력으로 신고 할 거야”라는 말을 했는데,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주변에 있던 남자 몇몇이 “희롱이라면 모를까, 너 성폭력이 뭔지 알기나 해?”라며 흥분했다. B는 ‘누가 들어도 위험할 수위였으니 성폭력이지’라고 대꾸했고, 이때 남자 C가 놀라운 견해를 들려줬다. “야, 성폭력은 성기가 정확히 삽입돼야 해. 그거 은근 조건 까다로워!”

어떤 경우에 성희롱이고 성폭력인가. 나 역시 기사를 쓰면서 늘 헷갈리던 부분이다. 이에 대해 매뉴얼은 ‘대체로 우리나라의 법체계에서는 형법상 범죄행위인 성폭력과 민사상 불법행위인 성희롱으로 구분되어 이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p.21 성폭력 등 관련 법률의 체계 p.22 는 다음과 같다.
성희롱에 대한 정의는 관련법마다 대동소이하다. 1)지위를 이용해 2)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3)불응을 이유로 상대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 여성가족부 관할의 ‘양성평등기본법’ 제 3조에서는 ‘성희롱’을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단체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또는 성적 요구 등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또는 상대방이 성적 언동 또는 요구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거나 그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이익 공여의 의사표시를 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p.23

- 현행「국가인권위원회법」제2조 제3호 라목에서는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 중 하나로서 성희롱 행위를 규정하면서 성희롱을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생략)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여 또는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성희롱 피해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할 수 있다. p.27

- 현행「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에서는 고용상 남녀의 평등한 기회보장 및 대우에 관한 내용은 물론 제2호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이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고 규정... p.28


형법은 성폭력 ‘범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형법에서는 제297조(강간), 제297조의 2(유사강간), 제298조(강제추행), 제299조(준 강간, 준강제추행), 제300조(미수범), 제301조(강간 등 상해·치상), 제302조(미성년자 등에 대한 간음), 제303조(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305조(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 등에서 성폭력 범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p. 29


현실에서 형법으론 처벌할 수 없는 사각지대가 발생하자, 신설되거나 개정된 조항이 나왔다.

- 2013년 6월 개정된 「형법」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변화는 제297조(강간)의 죄에서 피해자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남성도 강간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점이다.
-「형법」상의 강간죄는 피해자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가 결합되어야 성립하기 때문에 성기가 아닌 신체의 일부에 행위자의 성기를 넣는 범죄에 대하여 신체를 더듬는 정도의 행위를 처벌하는 강제추행죄를 적용하는 불균형이 있었던 것에 대한 지적으로 새로이 신설된 유사강간죄(297조의 2)가 있다. p.30

- 이 밖에도 형법에서 규정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기 위해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그리고「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등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p.32


그런데, 매뉴얼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다른 제안을 한다. 현행법이 규정한 성희롱과 성폭력을 엄격히 구분해 적용하기에 실제 현장, 그러니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사건과 행위 자체가 갖는 ‘복잡성’을 고려한 거다.

... 설문의 결과에 의하면 95개 대학 중 74%(70개) 대학에서 관련 규정에서 성희롱과 성폭력 행위를 정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성폭력 상담과 사건처리 현장에서 문제행위가 개념상으로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회학, 여성학 그리고 법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성희롱과 성폭력의 개념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건 자체가 복잡하여 행위를 구분하여 규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 이에 본 연구에서는 현재 대학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성 인권 침해 양상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성폭력'을 사용하고자 한다.
  여기서 성폭력이라 함은 형법상의 성폭력 개념이 아닌 '피해자의 동의 없이 행해지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행위'라는 광의의 개념이다.  (pp.19~20)

매뉴얼이 성폭력의 기준을 ‘가해자의 물리적인 행위’가 아닌, ‘피해자에게 행해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행위’로 규정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판단의 주체를 피해자로 삼은 거다. ‘다양한 성 인권 침해 양상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표현은 이번 연구의 방향성을 잘 말해준다.



2. 왜 ‘대학’의 특수성에 주목하는가?

우리가 ‘양천구 성폭력 피해자’나, ‘혈액형 B형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 매뉴얼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집단이 갖는 ‘특수성’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 내 성폭력이 갖는 ‘전형성’이 이번 연구가 진행된 결정적 이유다. 이에 대한 본문 설명을 그대로 옮겨 적겠다. 

- 대학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관련 상담은 우선 대학 공동체에 대한 특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대학은 10대 후반부터 60대 중반까지의 다양한 연령층에 해당하는 구성원이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구성원들의 역할과 위치도 매우 상이한 특징을 가진 곳이다. 따라서 각 구성원들의 만남과 관계들이 교수와 학생, 직원과 학생 또는 교수와 직원 같이 공적 성격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학생 간 선후배, 동아리 동기 등과 같이 공과 사의 영역을 넘나드는 관계맺음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 대학의 구성원들은 지식을 전달하고, 연구하며, 전문성을 키워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교육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캠퍼스의 일상은 성인이 된 젊은이들이 인간관계를 맺고 때로는 연애를 하기도 하며 실험이나 프로젝트를 위해 밤샘작업을 하거나, 동아리실에서 발표 공연을 위해 연습을 하는 등 본연의 연구와 학생지도 외에 이루어지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대학 공동체의 구성원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학생들은 일시적으로 머물다가 몇 년이 지나면 공동체를 떠나기 때문에 매년 졸업과 입학을 통해 구성원들이 바뀌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유동적인 구성원들이 적게는 몇 천 명에서 많게는 몇 만 명에 이르는 커다란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곳이 대학이다.

- 이러한 대학의 특성이 반영된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은 복잡한 양상을 가진다. 학생과 학생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49.2%로 가장 많이 보고되고 있지만,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도 23.2%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건을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는 과정은 모두에게 어려운 과제이다. 학생 간 또는 교수와 학생 간 사건은 당사자들의 관계가 다른 만큼 사건의 양상과 해결 과정도 차이가 난다.
p.61



3. '사건 발생 시 대학이 적극적으로 개입'…의미있는 외국 사례

매뉴얼이 인용하는 외국 대학들에 대한 자료와 사례들도 흥미롭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대로 옮겨 보겠다.

2000년대에 미국 법무부가 주관하여 전국 대학을 상대로 실시한 대학 내 성폭력 실태조사를 종합해 보면, 15~25%의 여학생이 대학 재학 중 강간, 강간미수, 성추행 등의 피해를 입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5). ... 2005년도에 실시한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은 대학에 다니지 않은 또래 여성보다 성폭력을 당할 위험이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7) 이는 대학이 일반 사회보다 여성에게 더 위험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 2014년 1월 22일 백악관은 "White House Task force to Protect Students from Sexual Assault" 13)(Memorandum Establishing a White House Task Force, 2014)를 발표하였다. 이 Memorandum은 the Office of the Vice President and the white House Council on Women and Girls에게 캠퍼스 내의 성폭력의 문제를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 주도적인 가교기관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2014년 9월 19일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은 대학 캠퍼스 내에서의 성폭력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그램인 "It's On Us"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이 캠페인은 모든 여성과 남성에게 "방관자적 입장에서 벗어나자"("step off the sidelines") 그리고 캠퍼스 내의 성폭력 해결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성폭력을 조용히 참고 넘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수용할 수 없는 것의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 이제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선언하며, 성폭행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관련법을 끊임없이 검토하고 있다.
pp.35~38


무엇보다, 하버드 대학의 관련 학칙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대학이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물리적인 공간 이상으로 해석해 성폭력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하는 의지가 읽히기 때문이다. 처벌 의지 뿐 아니라, 그 방식이나 논리도 매우 훌륭하다. 

... 대학이 어떤 행위에 대해 위의 정책들을 관철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교육활동에 대학이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지, 대학 소유물 내에서 벌어졌는지, 대학 공동체에 영향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은 학생, 교수, 직원, 하버드 피지정인(Harvard appointees), 제 3당사자가 성이나 젠더에 기반하여 괴롭힘을 행하였고 그것이 "1. 하버드의 소유물 내에서 행하여졌거나, 2. 하버드의 소유물 내가 아니라 하더라도, ⒜ 하버드 대학과 연관된, 혹은 하버드 대학이 인정하는 프로그램이나 활동과 관련이 있거나 ⒝ 대학 공동체 구성원에게 적대적인 환경을 만드는 영향을 미칠 때" 적용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기준은 미국 내의 거의 모든 대학이 공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해외에서 벌어지는 미국 대학 연계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가능하다.

... 대학은 대학 내 사건처리 기관에서 도움을 받고 신고하려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비밀유지 17)에 대해 당사자에게 미리 확실하게 통지하여야 한다. 대학은 당사자가 당해 사건을 이해하고 현명한 결정을 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비밀유지와 관련하여 
하버드 대학은 이 비밀이 대학의 징계절차를 관철하고, 진행되고 있는 괴롭힘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특정한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고지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예를 들어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적절한 서비스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대학이 사건을 추적하고 패턴을 파악하며, 적절히 하버드 대학의 공동체를 보호할 수 있는 단계적인 조처를 취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비밀유지는 불가함을 미리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은 만약 당사자가 사건과 당해 정보들에 대해서 오직 법적인 비밀 유지와 보고금지 의무를 가지는 사람과만 의논하겠다고 강력하게 원하는 경우라면, 이러한 희망 사항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18)
pp.39~40


앞서 말했지만, 여러 모로 유익한 정보를 담은 연구 보고서이자 지침서다. 기존에 없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고, 현장의 실무자들에게 특히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다음 글에선 실제 매뉴얼, 지침사항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다.


매뉴얼 본문 가운데 이번 취재파일에 인용된 text (각주 번호는 본문 그대로 가져옴)

5) Bonnie Fisher. The Sexual Victimization of College Women: Findings from Two National-Level Studies. Washington D.C.: National Institute of Justice and Bureau of Justice Statistics. 2000.
7) Heather M. Karjane. Sexual Assault on Campus: What Colleges and Universities are Doing About It. Washington D.D.: U.S. Department of Justice. 2005.
14) Sexual and Gender-Based Harassment Policy of Harvard University; Sexual Harassment policy of Stanford University; Sexual Misconduct Response of Yale University; student policies on discrimination and Harassment of Columbia University.
17) Sexual and Gender-Based Harassment Policy of Harvard University; Sexual Harassment policy of Stanford University; Sexual Misconduct Response of Yale University; student policies on discrimination and Harassment of Columbia University.
18) Sexual and Gender-Based Harassment Policy of Harvar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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