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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주 저속하다" 청와대 요구 거부한 정의화…아른거리는 긴급명령 그림자

[취재파일] "아주 저속하다" 청와대 요구 거부한 정의화…아른거리는 긴급명령 그림자

김수형 기자 sean@sbs.co.kr

작성 2015.12.17 09:51 수정 2015.12.17 15:2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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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아주 저속하다" 청와대 요구 거부한 정의화…아른거리는 긴급명령 그림자
● '친정과 원수'…정의화 국회의장이 자청한 기자회견
 
요즘 정의화 국회의장은 샌드위치 신세라 할 만합니다. 19대 국회가 회기를 얼마 안 남기고 여야 지도부가 선거구 획정과 경제·노동 관련 쟁점 법안을 놓고 벼락치기 숙제를 하는 중인데, 협상 진도가 도무지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정 의장이 그제(15일)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끝장 토론을 하자"며 직접 중재를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시간만 허비하고는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협상으로 답이 잘 안 나오니까 논의의 초점이 점점 직권상정으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여당은 정 의장이 직권상정을 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있고, 야당은 직권상정을 하면 가만 안두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특히 친정인 새누리당과는 거의 원수가 된 상태입니다.

지도부는 공개적인 회의 때마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결단을 요구하고 있고, 일부 강경파는 직권상정을 안 하면 해임 결의안이라도 내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 출신인데 친정에서 원망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정의화 국회의장이 어제(16일) 직접 기자회견을 자청했습니다. 대한민국 의전서열 2위이자 국회 사무처의 수장인 국회의장은 적어도 19대 국회 들어서는 여야의 정치적인 현안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국회 선진화법이 지배하는 19대 국회에서는 현실 정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여야의 싸움을 관망하는 큰 형님 같은 존재가 국회의장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기자회견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이었습니다.
 
● "저속하고 합당하지 않다" 청와대를 향한 돌직구 비판
  준비된 원고도 없이 자료 몇 장 들고 입장한 정 의장은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가장 억울한 부분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쟁점 법안을 자신이 직권 상정을 할 수 있는데, 안하고 있다고 공격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여야가 합의해 19대 국회부터 적용되고 있는 국회 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어 자신도 방법이 없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실제 국회법 85조에는 직권상정을 ▲천재지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와 합의하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각 교섭단체대표와 협의해서 정하게 돼 있습니다.

경제·노동 관련 법안을 직권 상정하려면 현 경제 상황이 국가 비상사태라는 판단이 있어야하는데, "지금 경제 상황을 그렇게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고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 의장은 "법적으로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라는 걸 꼭 알아 달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선거구 획정에 대한 생각은 달랐습니다. 선거구 인구 편차를 2대 1로 조정하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내년 1월 1일이 되면 현행 선거구는 법적으로 효력을 상실합니다. 그전까지 선거구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면 선거를 앞두고 혼란은 불가피합니다.

아무 결정을 못하고 새해를 맞게 되면 지역구가 법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당장 예비후보자들은 선거 운동도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정 의장은 국민의 참정권이 침해받는 "입법 비상사태"라고 표현했습니다. 직권 상정의 조건이 되는 국가비상사태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여야 협상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으면 연말, 연초에 직권 상정의 전제가 되는 심사기일을 정하겠다고 계획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미 청와대는 그제(15일) 경제 활성화 법안과 노동개혁 법안같은 쟁점 법안을 빼고 선거법만 직권상정해 처리하면 "국회의원의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라고 국회의장을 공개 비난한 바 있습니다. 국회의장은 이런 비난에 대해 몹시 불쾌해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이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선거구 획정이 안돼서 선거구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참정권에 심대한 훼손을 당하는 것인데, 그걸 밥그릇 챙기는 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저속하고도 합당하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청와대를 향해 이런 높은 수위의 어휘를 사용하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닙니다.
 
●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울 것"…3년 전 정의화 의장의 예언
 
지난 2012년 4월 20일, 정의화 당시 국회의장 직무 대행은 어제(16일) 기자회견을 한 똑같은 장소에 국회 선진화법에 반대 의견을 발표하기 위해 섰습니다.

이른바 날치기를 못하게 하기 위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그 대체로 의안신속처리제를 도입하기 위해 3/5 이상 의원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은 결국 국회를 마비시킬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의사 출신인 정 의장은 신경외과적으로 아주 특수한 질병인 '록인(lock-in) 신드롬'을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국회 선진화법이 이대로 가동하면 의식도 있고 눈도 말똥말똥한데 움직일 수도 없는 희귀 질환인 록인 신드롬에 국회가 걸릴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정 의장은 "직권상정 못하게 한다고 이런 대체안을 낸 것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성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19대 국회에서 현실 정치에 부합하지 않는 국회 선진화법을 여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과감히 연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지금 정 의장의 예언이 정확히 현실이 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상당수 법안이 여야 협의를 통해서 통과되고 있고, 입법 기능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쟁점 법안의 처리가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야당이 끝까지 반대하면 진도가 한발자국도 안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과거에는 날치기와 몸싸움을 통해서라도 법안을 처리했다지만, 지금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국회에서 찾아보기도 어려워진 직권상정을 해달라고 국회의장에게 친정 의원들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원 대다수는 국회의장 자신이 그렇게 문제 있다고 주장했던 선진화법에 동의했던 의원들입니다. 국회 선진화법은 19대 국회 들어 야당의 반대로 결국 개정되지 않았고, 이미 국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법체계가 된지 오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장이라고 하더라도 국가 비상사태도 아닌데, 국회 선진화법을 어겨가며 직권상정을 할 수 없다는 게 정 의장의 항변이었습니다.
 
● '정치적인 부담'은 누가질 것인가…긴급명령 폭풍전야

물론 새누리당 지도부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런 입법 마비 상태는 국가비상사태에 해당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 의장의 정치적인 결단으로 직권 상정을 하기만 하면 의석 과반을 점유하고 있는 새누리당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16일) 오후에는 새누리당 의원 전원 명의로 '직권 상정 요구 결의문'을 들고 찾아가 압박하다, 정 의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새누리당 출신인 국회의장이 정치적인 부담을 나눠졌으면 하는 게 여당 지도부의 솔직한 심정일 텐데, 너무 자기 정치만 하려 한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 노동개혁 5개 법안, 테러방지법, 북한 인권법 등 19대 국회 마지막에 몰려 있는 쟁점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는 매우 강력합니다. 경제가 점점 위기로 빠져들고 있는데, 선제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대통령은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야 협상이 꽉 막힌 상태에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특히 청와대는 이른바 '유승민 사태' 이후 여당 지도부가 자율권을 가지고 야당과 협상을 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여야 협상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국회에 청와대 정무수석이 나타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여당 지도부는 물밑 협상보다는 선명성을 강조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보여주려 애쓰는 모습입니다. 야당이 원하는 것을 주면 선뜻 줬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분위기가 여당 지도부 내부에서도 감지되기도 합니다.
 
어제(16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의화 의장은 쟁점 법안에 대해서는 직권 상정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대통령의 법안 통과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감안할 때 이제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야당이 원하는 걸 줘가며 협상을 하거나,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하는 것뿐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금융 실명제를 도입할 때 발동한 게 바로 긴급명령입니다. 헌법 제76조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있어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 최소한으로 처분 할 수 있는 게 긴급명령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은 어제(16일) "국회가 법안 처리를 못하면 다음은 대통령의 긴급명령밖에 없다"고 의미심장한 공개 발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긴급명령을 발동해도 국회의 승인을 받게 돼 있는데, 그때는 과반 출석에 과반 동의라는 규정을 적용받기 때문에 선진화법을 우회해갈 수 있기도 합니다.

정치 구도상으로는 간편해 보이는 일이지만,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실제로 정치적인 후폭풍은 엄청 날 겁니다. 자칫 선거를 앞두고 큰 악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청와대는 긴급 명령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안에 대한 절박함 때문에 외통수에 몰리면 청와대와 여당은 방법이 없는 걸 알면서도 결정을 강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남은 방법은 여야 협상밖에 없습니다. 아직 연말까지 보름 안 되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국회 논의는 결과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차적으로 정당성을 갖추는 것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야당도 무작정 법안을 반대하기 보다는 논의를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여야는 지금보다 훨씬 진지한 자세로 협상에 임해야 합니다. 여야의 끝장 기싸움에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국가 비상사태'라는 어휘를 기사에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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