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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모란봉 악단 사태로 드러난 북중 관계의 민낯

[월드리포트] 모란봉 악단 사태로 드러난 북중 관계의 민낯
북한 문제에 정통한 중국측 인사에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중국에 있어 북한은 어떤 존재인가요?" 그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습니다. "계륵."

중국은 북한을 절대 버릴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가치 있는 전략적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의 라이벌 앞에 버티고 있는 방파제입니다. 포기하는 순간 순망치한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이란 존재는 갈수록 전략적 부채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현 체제를 유지해주기 위해 중국이 투입해야 할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꼭 경제적인 원조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의 각종 분탕질을 뒤처리 해주느라 들여야 하는 외교적 노력까지 포함됩니다.

그래서 시진핑 체제 이후 중국은 대북정책에 있어 하나의 기조를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정상국가 관계로의 발전'입니다. 이전까지 북한과 중국은 '비정상 국가 관계'였습니다. 함께 미국에 대항해 싸운 혈맹입니다.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라 동맹국이었습니다. 당연히 서로를 특별 대우했습니다.

하지만 몹시 버거워진,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는 북한에 대해 중국은 이제 특별한 관계를 청산하고 싶습니다. 그저 '사이좋은 이웃'으로 남으려 합니다. 그것이 이름 하여 '정상 국가 관계'입니다. 이런 중국의 태도가 북한은 몹시 야속합니다. 이제까지 받아온 특별 대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관계로 가자는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북한과 중국이 그런 관계 변화를 놓고 벌이는 미묘한 신경전을 폭발적으로 돌출시킨 것이 이번 '모란봉 악단' 사태입니다.

지난 10월 중국 최고 수뇌부 가운데 한 명인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이 북한을 방문해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김정은 체제 성립 이후 북한을 찾은 최고위급입니다. 그동안 차갑기만 했던 북중간 기류에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북한은 이를 이어가기 위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직접 조직했다는 모란봉 악단을 중국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란봉 악단의 사상 첫 해외 공연이었습니다. 그만큼 북한으로서는 중국과의 관계 회복에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중국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전략적 자산에 대한 결속력을 강화하고 좀 더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대북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북한과 중국은 대단히 신속하게 모란봉 악단의 공연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서둘렀습니다. 세부 사항들에 대한 사전 교통정리가 부족했습니다. 외교가에서 흔히 쓰이는 경구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큰 줄기의 합의가 이뤄지고 방향에 대한 교감이 이뤄졌지만 사소하게 여겼던 세부 내용들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 협상이 깨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북한과 중국은 모란봉 악단의 공연을 계기로 교류의 물꼬를 트기로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더 멀리는 북한 최고 지도자 김정은의 방중까지 내다봤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정은 위원장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모란봉 악단의 첫 해외 방문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공연 내용에 대해서는 사전 협의를 충분히 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아니 서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중국은 '북한이 우리 입장을 고려해서 곤란한 내용의 노래는 하지 않겠지.' 북한은 '중국이 우리 공연 내용을 문제 삼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모란봉 악단의 공연 리허설을 보고 중국은 경악했습니다. 김정은을 노골적으로 우상화하는 곡이 들어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단숨에'라는 곡에 들어있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찬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장거리 미사일 실험은 명백한 UN안보리 결의 위반이라 중국도 대북 제재에 동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옹호하고 자랑하는 노래를 박수 치며 듣는다면 북한의 도발에 찬성하고 동참한다는 뜻이 됩니다. 중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이 대목에서 서로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중국의 생각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정상적 국가 관계에 입각해 북한에 공연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중국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공연이니만큼 불편한 내용에 대해 바꾸라고 요청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북한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아니 중국과 우리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할 때 이 정도 내용의 공연은 당연히 할 수 있지. 혈맹인 우리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찬성하지는 않더라도 한번 들어봐 줄 수는 있는 것 아냐.'

물론 공연 내용 하나만으로 공연 취소라는 파국적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중국 외교가의 한 대북 소식통은 "공연비용이나 수익금 배분 같은 미시적인 측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마 그런 문제로 일을 망칠까 싶지만 대규모 공연단이 움직이는 경우 이런 문제가 클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모란봉 악단의 베이징 공연을 추진하자'는 큰 틀의 합의를 하고 일을 추진했는데 막상 세부적인 사항들을 놓고 서로 말이 엇갈립니다. 비용을 누가 더 많이 대는지, 수익금을 어떻게 나눠 갖는지를 놓고 감정이 상합니다. 사소한 일로 자꾸 빈정 상하는데 급기야 공연 내용을 놓고 갈등이 터집니다.

결정적으로 관계를 보는 시각차가 드러나면서 북한이 그동안 쌓아왔던 섭섭함을 폭발시켰습니다. 비유해보자면 애인 사이였던 상대방이 '이제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했을 때 느끼는 배신감과 같습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어떻게 달라질 수 있니!'
북중간에 이런 시각차가 존재하는 한 모란봉 악단 사태와 같은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정상적 국가 관계에서의 관례에 입각해 북한을 대하는데, 북한은 과거와 같은 특별대우를 요구하면서 어이없는 충돌을 겪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이 원하는 옛 관계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죽의 장막'을 치고 살던 냉전 시대가 아닙니다. 게다가 중국은 북한보다 미국이나 한국과 더 큰 경제적, 외교적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니 북한이 '쿨' 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련을 못 버리면 북한 자신들의 꼴만 우습게 됩니다. 이번 모란봉 악단 사태처럼 말입니다. 뒷배경이 무엇이든 중국인, 나아가 세계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뭐니, 공연하겠다고 와서 몇 시간 전에 픽 토라져 돌아가는 건. 역시 비상식적이고 황당한 집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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