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또 사고를 쳤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저 호기심에 잘 모르고 뚜껑을 열었는데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뜻이니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겠다. 차라리 '트럼프의 상자'를 열었다고 하자.
부동산 재벌 출신의 공화당의 선두 대선 주자 트럼프는 미국민들의 불안감을 파고들었다. 14명의 목숨을 앗아간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 총격 사건이 정치적 테러로 드러나고, 남녀 용의자가 IS를 추종하는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 12월 7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연설에서 트럼프는 "무슬림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전면적으로 완전히 차단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의 대표들이 도대체 - ‘hell’이란 표현을 썼다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규명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긴 했다.
하지만 무슬림, 즉 이슬람 신도라는 특정 집단 전체에 대한 차별적 언사임에 틀림없다. 미국 국민 가운데 무슬림은 성인만 해도 180만 명에 이른다. 무슬림의 기여가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강대국 미국도 있기 어려웠을 거라는 보도도 나왔다.
막말로 이 자리에까지 온 트럼프라 해도 이쯤 되면 막말 정도가 아니다. 도발이다. 상대 당 내부 문제에 대해선 별 말 않고 점잖게 대응하던 백악관이 발끈했다. 미국의 헌법에 배치된다며 트럼프는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고 성토했다. 공화당이 트럼프와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에 끌려들어가려 하느냐고 반문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청와대 대변인이 야당의 대선 주자에게 물러나라, 야당 지도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전날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서 대국민 연설로 민심을 달래며 무슬림을 포용하자고 호소했다. 미국인 대 무슬림의 싸움이야말로 IS가 원하는 것이며 테러를 물리치려면 종교적 차별을 거부하고 무슬림 공동체의 지원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다음날 터져 나온 트럼프의 무슬림 발언은 오바마 대통령의 면전에 침을 뱉은 격이니 백악관의 격한 반응은 예상할 만한 일이었다.
● 안보 담론의 싸움…총기 vs 무슬림
국제 정치를 이론적으로 들여다보면 안보 담론의 싸움이다. 샌버나디노 테러는 두 가지 문제의 교차점에서 일어났다. IS 추종 세력이 공격용 총기를 손에 넣음으로써 실현됐다. 오바마는 대국민 연설에서 이점을 상기시키며 이것이 바로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의 문제라고 설파했다. 총기 규제에 비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미국민들의 안전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오바마의 ‘안보문제화(securitization)’ 시도는 성공했을까? 다음날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오간데 없어졌다. 트럼프는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라는 폭탄 발언으로 무슬림의 존재 자체를 안보문제화했다. 특정 종교, 특정 집단 전체를 미국의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먹혔다. 담론 싸움에서 오바마를 압도하며 모든 논의가 트럼프를 중심으로 돌아가게끔 만들어버린 것이다. 장기적으로 누가 승자가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트럼프가 이긴 셈이다. 자사 주최 공화당 대선 주자 TV토론을 앞둔 CNN은 얼씨구나 달려가 트럼프와 단독 인터뷰를 해줬다. 이것이 현실이다.
공화당에서는 대선 주자들 뿐 아니라 폴 라이언 하원의장까지 나섰다. 무슬림 차별은 공화당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었다. 대선 주자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쌍욕이 아닌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동원해 트럼프를 비난했다. 오하이오 주지사 존 케이식은 트럼프를 히틀러에 빗댄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재확인했다. 곳곳에서 슈바슈티카 나치 십자문양에 트럼프 얼굴을 합성한 '트틀러' 그림이 나붙고 있다.
트럼프가 열어버린 그 '트럼프 상자'는 어쨌든 통제 불능으로 치닫고 있다. 대서양 건너 영국과 유럽, 터키, 중동까지 파장이 빠르게 확산됐다. 쏟아져 들어오는 외신 기사들을 보면 무언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트럼프의 영국 입국을 금지시키라는 청원에 가속도가 붙었다. 10만, 20만, 30만 명을 넘어섰다. 의회는 청원 심의에 착수해야 한다. 앞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트럼프의 발언은 분열적이고 도움이 안 된다, 그저 틀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보수, 노동 양당 정치인들도 트럼프의 영국 입국 금지를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영국에서 1천 마일 이내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동조했다.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악의 화신 볼드모트에 비유한 트윗을 링크하며 "끔찍하다, 볼드모트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적었다.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로버트 고든 대학교는 트럼프에게 줬던 명예 학위를 취소해 버렸다.
미국 뉴욕에서는 기독교와 무슬림 등 교계 인사들이 함께 집회를 열었다. 뉴욕 시의회 의장은 트럼프는 "역겨운 인종주의 선동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슬람권인 터키와 UAE, 사우디아라비아 등 민심도 들끓고 있다. 언론들은 연일 트럼프를 성토했다. 1945년 이래 히틀러와 가장 유사한 인물이 됐다며 무슬림 입국 금지 발언이 바로 극단주의라고 일침을 놓았다.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서 승리하고 내년 11월 본선에서도 이겨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면 과연 정상적인 외교 수행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인다. 그러나, 트럼프는 보란 듯 이달 말 이스라엘을 방문해 네타냐후 총리를 만나기로 했다.
● 미 대선 판 흔들…그래도 트럼프 주도로 간다?
공화당 지도부의 고민이 깊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비롯해 정통 보수주의자들은 트럼프의 무슬림 차별 발언은 공화당이 추구하는 보수주의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대선 주자들 가운데는 테드 크루즈 정도가 트럼프의 정서에 가깝고 다른 주자들은 이 문제에서 만큼은 대척점에 서 있다. 여성 주자 칼리 피오리나는 “오바마는 과소반응, 트럼프는 과잉반응”이라며 일석이조의 화살을 날렸다.
문제는 트럼프가 어느새 거물, 아니 괴물로 자라 당으로서도 통제하기 힘든 지경이 됐다는 데 있다.
트럼프는 "당이 자신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으면" 무소속 출마를 고려할 수 있다고 흘리고 있다. '공정성' 판단은 자신이나 자신의 지지 세력이 할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공화당으로서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공화당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프라이머리와 코커스에 참여할 당원 가운데 트럼프의 무슬림 발언을 지지한다는 이가 65%에 달한다는 긴급 온라인 조사까지 나왔다.
공화당 경선 판도가 트럼프의 페이스에 계속 끌려갈지, 누군가 브레이크를 걸고 정상적인 정치로 방향을 틀 수 있을지, 트럼프가 열어젖힌 ‘트럼프의 상자’에 미국 대선전이 기로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