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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웃집 악당', 그리고 관리 없는 자치의 비극

[취재파일] '이웃집 악당', 그리고 관리 없는 자치의 비극
대학 시절 해외 배낭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내려 한국 땅을 처음으로 디뎠을 때 느낀 이상한 ‘생경함’을 기억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풍경은 바로 어디에서나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였습니다.

대지의 빈틈을 메우려는 듯 아파트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풍경이 참 이상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찡했습니다. 이 첫 풍경이야말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 쳤던 우리의 압축 성장 역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고작 3주 외유(外遊)했을 뿐인데, 20년 넘게 살아온 땅이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오는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53%. 2010년 기준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삽니다. ‘아파트’ 말고도 ‘연립 주택’, ‘다세대 주택’ 등 주택법상 ‘공동 주택’ 구획에 넣을 수 있는 주거지에 사는 인구를 합치면 64%에 이릅니다. 우리나라 국민 열 명 중 여섯 명은 어쨌거나 천장과 천장을, 벽과 벽을 맞대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아옹다옹 함께 살아가는 터전에선 늘 크고 작은 갈등이 따르는 법입니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층간 소음 갈등이나 아파트 관리비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 중엔 안타까운 참변도 있습니다.

한 달 전쯤이었습니다. 서울 용산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들끼리 주먹다짐이 벌어져 한 명이 끝내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지어진 지 20년이 넘은 이 아파트 단지는 8개동에 130세대가 사는 작은 단지였습니다.

사건은 아파트 주민 대표 자리를 두고 특히 최근 3년 동안 갈등이 심각했던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연임에 실패한 전 주민 대표의 남편과 현 주민 대표가 원래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마침 다가온 동 대표 선출의 선거인단 구성 방식을 두고 싸움이 붙은 겁니다. 아파트 곳곳에는 그간의 갈등을 보여주듯 선거위원단 전원이 사직했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주민들 이야기를 들으니, 이들은 적어도 14년을 함께 살아온 ‘이웃’이었습니다. 갈등의 뿌리도 함께 산 세월만큼 깊었습니다. 서로를 웬수처럼 여긴다 했습니다. 밀치고 싸우는 장면을 봤다는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송사도 잦았습니다.

그러나 이 단지는 아파트 관리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소장도 없고, 관할 구청이 직접 대표 선출 과정이나 관리 전반을 감독하는 ‘의무관리대상’도 아니었던 터라 아파트 전·현직 대표들 간 몇 년에 걸쳐 일어난 갈등을 중재할 만한 마땅한 계기가 없었습니다. 

주택법상 ‘의무관리대상 공동주택’은 150세대 이상 공동주택 중 전문적으로 주택을 관리하는 사람을 두고 자치 의결기구를 구성해야 하는 공동주택을 말합니다. 이 의무는 대개 구청으로 귀속됩니다.

매년 1회 이상 회계감사를 받거나 사업자 선정 방식에 대한 공개, 관리비 장부 내역을 월별로 작성해 증빙서류와 함께 보관하는 등 여러 의무 사항을 준수해야 합니다. 대표의 최대 선임 기간은 4년, 중임까지만 가능하고 안전시설 점검 의무 등 위반할 때 과태료를 물어야 하는 사안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의무관리대상’의 경우 아파트 입주자의 대표 선출이나 의결 기구 구성 과정을 구청이 보고받게 돼 있단 겁니다. 최소한 기관에서 관할 구역 내에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아파트단지가 어떤 ‘판’으로 굴러가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다(또는 지켜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난달 취재했던 이 아파트 단지의 사례가 더욱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이 아파트 단지에는 비록 대표의 권한 하에서 대리인의 성격을 띠긴 해도, 전문적으로 아파트를 ‘관리’할 수 있는 ‘소장’조차 없었습니다. 취재를 위해 아파트 단지를 찾았을 때도 열댓 평 남짓한 1층 관리소에는 경비 관리인 몇 명만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회의를 하려고 모여든 몇몇 주민들마저도 정확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투표를 언제 하려고 했는지, 돈 문제는 끼어있지 않았는지, 각종 ‘직’을 맡았을 때 관리할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주민도 있었고, 안다고 말하는 주민들도 서로 다르게 말했습니다.

여러 재난 현장에서 취재를 했던 기자들이 130세대가 모여 사는 이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관리’의 부재가 일으킨 ‘자치’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표’는 있지만 ‘주민’은 없는 ‘미완성 자치’ 말입니다.

물론 복잡다단한 개인사의 갈등을 정책 하나의 부재에서 찾는 것은 공허한 환원론일 뿐입니다. 그렇더라도 ‘전·현직 대표’들 간의 갈등이 수년에 걸쳐 그것도 갖은 송사가 오갈 정도로 심각했다는 사실을 책임 있는 누군가가 인지했더라면, 적어도 ‘인선’을 앞두고 주먹다짐으로 사람이 숨질 만큼의 갈등은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의무관리대상이 아닌 여러 아파트 단지를 묶어서라도 자격을 갖추고 아파트 전반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사는 주민들이 적은 중소형 단지라도 어떻게 관리비를 집행할 것인지, 어떻게 점검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적어도 법리적으로 검토할 수 있고, 투명하게 전 과정을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흘러나왔던 얘기지만 지난 8월 개정된 공동주택관리법에는 아쉽게도 그 내용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 게시판, 선거인단이 모조리 사퇴했다는 공고 바로 옆에는 용산구청에서 실시하는 "공동주택의 분쟁을 예방하고 열린 아파트 문화 조성을 돕기 위한" 윤리 교육이 예정돼 있다는 공고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윤리교육이 시작된 지 3시간 만에 이런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낙엽이 아름다웠던 이 아담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윤리 교육’이 아니라 ‘관리소장’이나 ‘구청 공무원’은 아니었을까요. 소규모 아파트 단지에 대한 ‘관리 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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