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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00m에 0.2초 단축, 약에 목숨 거는 이유

[취재파일] 100m에 0.2초 단축, 약에 목숨 거는 이유
▲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러시아 육상의 금지약물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이 러시아 육상 선수 전체에게 모든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하자 세계기록을 28번이나 경신한 여자 장대높이뛰기 스타 옐레나 이신바예바(33살) 등 유명 선수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고 나섰습니다. 이신바예바를 비롯한 러시아 육상선수들은 모스크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금지약물과 아무 관계가 없는 나 같은 선수가 왜 리우 올림픽을 비롯한 모든 국제대회에 나갈 수 없느냐?”며 국제육상경기연맹의 결정을 강하게 성토했습니다.

이렇듯 금지약물 복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도핑을 해온 선수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료 선수들과 조국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금지약물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기록 단축의 효과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세계 정상급 선수의 경우 스테로이드 등 근육 강화제를 사용하면 남자 100m에서는 0.2초, 여자 100m에서는 0.3-0.4초의 기록 단축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어떤 선수를 대상으로 과학적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가 아니라 금지약물을 복용한 선수의 전후 기록을 분석해 귀납적으로 얻은 결론입니다. 200m, 400m에서는 당연히 100m보다 단축되는 시간이 더 늘어납니다. 정확한 데이터는 나오지 않았지만 투포환, 투원반, 투해머 같은 순간적인 파워를 사용하는 투척경기에서도 기록 향상 효과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금지약물을 복용해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기록을 단축시킨 대표적 사례가 ‘도핑의 대명사’인 캐나다의 벤 존슨입니다. 벤 존슨은 1961년생으로 ‘숙명의 라이벌인 ’육상 황제‘ 미국의 칼 루이스와 동갑내기입니다. 1984년 LA 올림픽 남자 100m결승에서 두 선수가 대결했는데 루이스는 9초99로 금메달, 벤 존슨은 10초22로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루이스는 이 대회에서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까지 휩쓸며 1936년 제시 오언스 이후 48년 만에 올림픽 육상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칼 루이스가 세계적 스타로 등극해야 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벤 존슨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지만 1985년까지 내리 8번 대결해 모두 졌습니다. 191cm의 장신인 칼 루이스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따라잡기에는 177cm의 벤 존슨으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키도 작았지만 근육도 그렇게 발달하지 못해 100m 선수로는 왜소한 모습이었습니다. 단거리 육상 선수가 보통 30살까지는 기록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대략 1991년까지 존슨이 루이스를 이기기 힘들었습니다. 쉽게 말해 루이스가 버티고 있는 한 존슨의 육상 인생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존슨은 결국 금지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에 손을 댔고 ‘악마의 유혹’에 빠진 효과는 바로 나타났습니다. 1987년 로마 세계선수권에서 벤 존슨은 9초83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종전 세계기록을 0.1초나 경신했습니다. 칼 루이스는 9.93으로 2위였습니다. 출발부터 끝까지 루이스는 벤 존슨을 단 한 순간도 앞서지 못하고 완패했습니다. 벤 존슨의 외모도 괄목상대할 만큼 달라졌습니다. 터미네이터를 방불케 하는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를 갖게 된 것입니다.                     

존슨에게 인생 최고이자 최악의 순간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습니다. ‘세기의 대결’로 지금도 지구촌 스포츠팬의 뇌리에 남아 있는 100m 결승에서 벤 존슨은 9초79로 자신이 갖고 있던 세계기록을 0.04초 경신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2년 전 영국의 <가디언지>가 보도한 것인데요, 벤 존슨이 라이벌 칼 루이스를 얼마나 의식했던지 결승선을 통과하기도 전에 이미 팔을 번쩍 들고 루이스를 쳐다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경기에서 칼 루이스가 9초92로 2위, 영국의 린포드 크리스티가 9초97로 3위, 미국의 캘빈 스미스가 9초99로 4위로 들어왔습니다. 금지약물을 복용할 경우 0.2초가 단축된다는 주장을 여기에 적용하면 벤 존슨은 9초99가 돼 금메달은커녕 스미스와 동메달을 놓고 사진 판독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0.01초차로 메달 색깔이 바뀌는 100m에서 0.2초는 그야말로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는 시간입니다. 벤 존슨의 도핑이 만약 들통이 나지 않아 금메달을 박탈당하지 않았다면 그의 약물 복용은 나쁜 의미에서 ‘신의 한수’가 됐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금지약물을 목숨 걸고 먹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도핑 테스트에 걸릴 확률이 반반이라는 계산때문입니다. 금지약물 복용이 확실한 선수를 대상으로 테스트를 해도 양성반응이 나올 가능성은 약 70%입니다. 나머지 30%는 검사 과정의 실수나 오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핑을 하는 선수들은 약을 먹은 뒤 며칠 뒤에 효과가 나타나고, 또 며칠이 지나면 테스트를 받아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현재 도핑 테스트는 대회 기간 메달리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물론 대회 기간이 아니어도 무작위(Random)로 불시에 이뤄지고 있지만 100% 다 적발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여러 상황을 종합하면 어떤 선수가 금지약물을 복용해도 실제 적발될 확률은 많아야 50%라고 말합니다. 반반의 확률이라고 한다면 엄청난 보상이 뒤따르는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위해 모험을 건다는 것입니다. 

고환암을 극복한 ‘사이클 황제’로 칭송받다 도핑 사실이 발각돼 엄청난 충격을 안긴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은 상상을 초월하는 교묘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약물을 사용해왔습니다.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는 말처럼 선수들의 도핑도 더욱 지능화되고 과학화되고 있습니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이번에 러시아 육상 선수 전체에게 철퇴를 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일벌백계’하지 않고는 도저히 도핑을 뿌리 뽑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선수들의 도핑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조직적으로 금지약물 복용을 지시하고 관리한 러시아 스포츠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반발이 아니라 반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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