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의 사소하게] 고노, "경제계가 정계 눈치를 보는 게 일본 현실"

이주형 기자 joolee@sbs.co.kr

작성 2015.11.18 14:25 수정 2017.02.14 19:2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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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에서 3년여 만에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담으로 냉랭하던 3국간에 어느 정도 화해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일 정상이 '가능한 조기 타결을 위한 협의 가속화’에 대해 합의한 이후에도 양국 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다. 이 문제가 나올 때마다, 아니 한일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질 때마다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일본 관방장관과 외무상, 자민당 총재,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일본의 거물급 정치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78)다. 1993년 고노 당시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과 군의 강제성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시했다.

이후 고노 담화의 계승 문제는 일본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사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를 판단하는 일종의 시금석이 돼왔다.  현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 계승에 대해 다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고노 담화 발표의 주인공인 고노 전 일본 중의원 의장을 일본에서 만났다.

“한국의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강제 연행’이라는 문장으로 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노 담화에서는 '강제 연행’이라고 쓰여 있지는 않다. 다만 군에서 많은 여성들을 모았다는 것은 쓰여 있고 전쟁 중에 군과 민간인 여성 간의 관계이므로 모종의 강제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지난 10일 도쿄 프레스센터에서 ‘한중일삼국협력사무국’과 중국 ‘환구시보’가 주관한 합동취재에 나선 한중일 3국 기자들과 만난 고노 전 중의원 의장은 "민간 여성에 있어 매우 가혹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는” 종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 문제’로서 "국제적으로 봐도 지극히 중요한 문제"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특히 전 세계 종군 위안부에 대한 강제 연행이 명확하게 문장으로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벌어졌던 강제 연행 사실이 재판의 판결로 나온 적이 있다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아베 총리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건강해 보인 고노 전 중의원 의장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히 인터뷰했지만 현안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에 머뭇거림이 없었다.일본 아베 총리 해상자위대 사열고노 전 의장은 지난 9월 아베 내각이 속전속결 식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안보법안’에 대해서도 많은 헌법 학자들이 위헌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주변국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안보법안은 일본 자위대가 외국 군대(미군)의 군사 작전에 제한 없는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법으로 일본 역대 정부가 일관되게 유지해온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헌법 9조를 다르게 해석한 법안이다.    

고노 전 의장은 안보법안에 찬성하는 일본인조차도 안보법안을 통과시키려면 헌법을 개정한 후에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라고 소개하면서 일본 여론은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쪽이훨씬 많기 때문에 아베 총리가 헌법 개정을 포기하고 해석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고노 전 의장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최근 한중일 정상 회담의 일본 내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안보법안 참의원 본회의 통과 전후로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면서 내년 3월 참의원 선거에서 (개인적인 바람대로) 안보법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많이 선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한중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아베 내각 지지율이 다시 올라가고 있어 상황이 다시 바뀌고 있다는 거였다.

주로 위안부 문제와 과거사 문제에 집중한 한국 기자들에 비해 중국 기자들은 경제 이슈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중국 주도의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 일본이 참가를 거부한 것이 중일 경제 교류에 영향을 미치는지, 경제 교류가 양국 간의 관계 악화를 막는 효과가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고노 전 의장은 자신은 일본이 AIIB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소수 의견이라고 했다. 다만 경제계에서는 참여하는 게 좋다는 목소리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50여 년 전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은 옛날 사람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경제 교류는 상당히 중요해서 국가간 관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옛날 사람이다.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50여 년 전이다. 그 때는 일본 경제계가 영향력이 있었다. 정치에도 이런 저런 의견을 낼 수 있었다. 힘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경제계는 정치의 눈치를 보게 됐다”

일본 경제는 세계는 물론 아시아, 아니 일본 국내에서조차 과거의 위상을 잃었다는 걸 실감케 하는 발언이었다. 이번 한중일 기자 합동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외교관은 불과 20여 년 전 중국이 여전히 후진국에 머물러 있을 때 중국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지금처럼 목청껏 소리높이지 않았다며 결국 경제력과 국력이 강해진 것이 외교 관계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중국 측 실무를 담당했던 황시리엔(黃溪連) 중국 외교부 아시아국 부국장은 이번 3국 정상회담에서 (워낙 뻔한 부분이니까) ‘역사 문제는 빼고’ 가장 논의 잘 안 이루어졌던 부분을 이야기해 달라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역사문제를 빼고 이야기하려해도, 역시 역사 문제다."(除了歷史問題, 還是歷史問題) 중국 경제가 고성장하면서 이에 따라 국력도 굴기하고, 그러면서 역사 문제도 자신감 있게 발언하는 중국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고노 전 의장이 20여 년 전 고노 담화를 발표할 당시를 회고한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 무렵 동북아 정세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 일본의 입장은 일본과 미국 사이에 안보조약이 있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도 안보 보장 협정이 있으므로 미국을 통해서 일본과 한국은 동맹 관계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꼭 미국을 통하지 않더라도 일본과 한국이 직접적으로 더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북아 역사 인식을 비롯한 해석 및 인식의 차이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