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시작하려던 찰나, 이연복 셰프가 건넨 말이다. 그리곤 냉장고에서 캔커피 한 팩을 꺼내 풀어놓았다. 냉장고 안은 각종 브랜드의 캔커피로 가득했다.
"한 방송에서 아침, 저녁으로 캔커피를 마신다고 이야기했더니 팬들이 보내줬다. 냉장고에 캔커피가 줄어들면 불안하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창고에도 한가득 쌓여 있다. 매일 흐뭇하게 마시고 있다"
그야말로 아이돌 같은 인기다. 셰프테이너의 전성시대라고는 하지만, 이연복만큼 전 연령층에 사랑받은 셰프는 없다.
나이 든 어른 하면 '꼰대'로 취급하는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이연복은 제대로 된 어르신 대접을 받고 있다. 이것은 '장인'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우리 사회에서 발견한 '진짜 대가'에 대한 존경심의 반영이다.
요즘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이연복 셰프를 만났다. 방송 녹화 시간을 제외하곤 자신의 레스토랑 '목란'에 머물고 있는 그다. 이번 인터뷰는 목란의 개인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연복 셰프는 지난달 16일부터 방송된 SBS 플러스 '강호대결 중화대반점'(연출 옥근태, 책임프로듀서 전병래)에서 진정한 대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내면서도 고수의 품격을 보여준 그지만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최고급 중화요리를 선보이며 대가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또 다른 대가 여경래, 유방녕, 진생용 셰프가 함께한다. 한 주방에서 몸을 담기도 하고, 주방 밖에서 남다른 우정을 쌓아오기도 한 이들은 '중화대반점'이라는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이연복 셰프는 3회 방송에서 '삼색 춘권'으로 첫 승에 성공했다. 이제는 잊혀진 중화요리를 만들라는 주제가 주어졌던 회였다.
"사실 그날 애를 좀 먹었다. 춘권은 기구와 불이 중요하다. 예전엔 다 손으로 만들었지만 요즘은 잘 안 하는 이유가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춘권은 불이 세면 안 되고, 프라이팬도 가정용을 써야 한다. 하지만 중식당 화력이나 프라이팬은 가정용과는 다르지 않나. 다행히 이런 문제를 미리 알고 대비를 했기에 요리를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연복 셰프는 전통 방식으로 춘권피를 뽑고, 맛과 영양을 고려한 세 가지 주재료로 춘권 속을 채웠다. 그 결과 압도적인 투표 결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날 이연복 셰프는 제자인 최형진 셰프와 함께 눈물을 보였다.
"제자가 먼저 눈물을 흘렸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나 또한 뭉클해지더라. 최형진, 정지선 두 사람 모두 굉장히 아끼고 마음이 잘 맞는 셰프들이다. 그들과 호흡을 맞춰 요리를 할 수 있어 무척 든든하다"
이연복 셰프는 중화대반점에 대해 "회를 거듭할수록 셰프들의 승부욕이 강해지고 있다. 집안 살림도 거덜낼 판으로 다들 집중하고 있다"면서 "나 같은 경우는 별도로 연습할 시간이 많이 없어 구상만 해가고 현장에서 바로 요리를 하는 편이다. 힘든 상황이지만 최선을 다해 맛있는 요리를 선사하려고 한다"고 각오를 전했다.

이연복 셰프는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화교였던 그는 명동에 있는 외국인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생계가 여의치 않아 학업을 계속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선생님이 등록금 못 낸 사람을 일으켜세우는 게 너무 싫었다. 그게 싫어 학교 땡땡이 치고 남산 가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님에게 학교를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외할아버지가 중국집을 하셨고, 아버지도 잠시 요리를 하셨기에 나도 요리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연복 셰프에 따르면 그 때는 화교가 화교를 챙기던 시절이었다. 실업률이 높아 외국인은 취업하기도 여의치 않았다고. 그래서 그는 아버지 지인의 중국집에 들어가 배달통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때 그의 나이 13살이었다.
"그 이후로 여러 곳을 옮겨다니면서 요리를 배웠다. 악덕 업주를 만나 고생하기도 하고, 돈을 떼이기도 하면서 숱한 고생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요리만큼은 열심히 배웠다. 1977년 사보이 호텔 중식당에 들어갔고, 홍보석, 호화대반점 등 당시에 잘나간다는 중식당을 거쳤다. 그러다가 대만 대사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 그곳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1988년, 그는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다양한 음식 개발에 대한 목마름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이연복 셰프는 일본의 중화요리 식당과 한식당, 일식주점 등에서 일하며 약 10년간 체류했다. 이연복에게 이 시기는 값진 경험과 교훈을 준 시간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배짱을 배웠다. 오사카에 식당과 주점이 몰려있는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의 가게들은 하나같이 장사가 잘되니 메뉴에 도통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재료값이 더 들더라도 맛있는 메뉴를 개발해 내놓았다. 매출이 엄청나게 올랐다. 그랬더니 주인이 장사 장되는건 생각도 안하고 장을 보는데 왜 이렇게 많은 돈을 쓰냐고 하더라. 황당해서 뒤도 안돌아보고 나왔다.
서비스나 경영방식, 사업 수완도 체득했다. 일례로 골목에 망하기만 하는 식당이 있었다. 그곳을 싸게 인수해 동네 최고의 식당으로 만들었다. 손님을 위한 맞춤 서비스를 했다. 일본에서 한국식 중식을 선보였고,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오면 그들에게 맞는 음식을 만들어냈다"

이연복 셰프가 후각을 잃었다는 건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26살 무렵이었다. 대사관에서 일할 때인데 대사가 1년에 한 번씩 대만에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 그때 대사의 주의치에게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축농증으로 고생하지 말고 수술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수술을 받았는데, 그게 잘못돼서 신경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처음 그 뉴스를 접했을 때 누구나 든 생각은 "후각을 잃은 요리사가 어떻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였을 것이다. 미각을 예민하게 발달시키는 것으로 치명적인 한계를 극복했다.
"후각이 죽었으니 미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금방 적응이 되더라. 그러나 요리하는 사람이 냄새를 못 맡는다는 건 치명적이니까 소문을 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30여년 가까이 숨기고 살았다"
그 뒤 이연복 셰프의 식생활엔 큰 변화가 생겼다.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기 시작했다. 미각을 세밀하게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냄새 때문에 "이거 무슨 냄새야?!"할 때가 있는데 난 아무것도 못 맡으니 편할 때도 많다"고 웃어보였다.

이연복 셰프는 방송에서 탕수육 반죽의 황금비율이나, 깐풍기 소스 등 레시피를 공개했다. '영업 비밀'에 가까운 이런 비밀을 이렇게 공개해도 될까 싶을 정도다.
"그 정도 팁을 공개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반대로 그런 요령을 몰라 집에서 요리할 때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비법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나와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공개한 것이다. 비슷하게라도 하면 맛이 훨씬 좋아질 수 있다"
중식 외길 40년, 대가가 되기까지 그가 지켜온 요리 철학이 궁금했다. 원칙과 철학은 복잡하거나 거창하지 않았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요리사로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재료 갖고 장난치지 말자'다. 요리는 재료가 70%, 기술이 30%이다. 좋은 재료를 쓰면 음식은 다 맛있다. 재료가 본연의 맛을 내려면 신선해야 한다. 그래서 늘 장을 볼 때 재료를 꼼꼼하게 보는 편이다"
메뉴 개발에는 어느 정도 시간을 쏟느냐고 묻자 "나는 외식을 자주 하는 편인데 먹은 음식이 맛있으면 그것이 연구 대상이 된다. 어떻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반환점을 앞둔 '중화대반점'을 임하는 각오에 대해서는 "우승에 대한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셰프들도 가지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나올 정도로 열정을 불태우는 셰프도 있지 않나. 매 승부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중식 대가들의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중화대반점'은 오늘(7일)밤 11시 SBS 플러스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