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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객님"…조금 '덜'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

감정노동자 보호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

[취재파일] "고객님"…조금 '덜'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상점에 들어간다. 편의점에 들어가고, 드러그스토어에도 들어간다. 분식집에 들어가고, 카페에 들어가고,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 가기도 한다. 주말에는 대형마트를 찾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기도 한다. 여성인 나는 가끔 미용실에 가고, 네일샵에 가기도 한다.

이렇게 나열한 곳들에서 우리는 보통 '고객님’으로 불린다. 활짝 웃는 얼굴로, ‘솔’ 음에 맞춘 높이의 목소리로 말을 걸거나, 계산을 해 주는 직원들을 만나기도 한다. 세상에 그렇게 다정다감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마음은 불편할 때가 적지 않다. 직원과의 대화가 그냥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에 눈도 안 마주치고 나온 적이 있을 정도다.

자주 찾는 카페에서 “어머 또 오셨네요.” 라고 반갑게 맞이하는 직원의 인사가 반가워야 하는데, 어떨 때는 부담스럽다. 고객은 왕이라고 하는데, 그 왕의 자리가 불편한 것이다. 대개 그런 상황에서 해당 직원은 내가 주변에서 만나기 어려운 친절을 보여준다. 과한 향수 냄새에 취한 듯 친절에도 어지러울 때가 있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아이들과 부모들을 하루 종일 상대하고,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줘야 하는 일이었다. 유원지에서 캐릭터 머리띠를 하고, 손을 흔들며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방식의 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돌이켜보면,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지금껏 지어본 적 없는 가장 밝은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얼굴에 표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말을 해댔으니, 퇴근만 하면 입에 지퍼를 잠근 듯 별 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루 분량의 감정을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 동안에 이미 다 소진했던 것이다.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객을 응대하는 이른바 ‘감정 노동자’들을 마주하면, 그때의 그 얼굴이 겹쳐 보인다. 하루 종일 고객을 향해 웃음을 보이고, 최선을 다해 일한 그와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갈 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일터가 아닌 집에서도 음성은 ‘솔’ 음계 높이를 유지하고 있을까.

우리는 고객이라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소비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감정을 과소비하고 있지는 아닐까. 돈을 벌게 해주는 장소에서 만났고, 실제로 내가 돈을 지불했다고 하면 그 소비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되는 것일까. 서비스도 상품이라는  상식은 이런 의문에까지 답변을 주지 않는다.

감정도 총량이 있다는 가정이 있어야겠지만, 고객에게 쓰여진 만큼  ‘감정 노동자’가 보유한 잔여 감정은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그 감정 노동자가 가족, 친구, 이웃에게 사용할 감정을 빚내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조금 덜 친절한 직원의 얼굴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툭툭 내뱉듯 일상적인 말로 응대하는 매장 직원을 대할 때가 마음이 더 편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파트 앞 동네 슈퍼마켓이 그렇다. 슈퍼마켓에 일하는 여성들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동네 아주머니와 표정이 다르지 않다. 과도한 꾸밈이 없고, 일상의 얼굴이다.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한 시민단체가 조사해봤더니, 의료·금융·도소매 종사자 2천여 명 가운데, 상대하기 어려운 고객을 응대하면서 스트레스 정도가 ‘위험’ 수준에 도달한 비율이 여성이 45%, 남성이 15%였다고 한다. 마음이 곪아가는 지경에서도 여전히 웃으며 고객들을 응대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란 얘기다. 그 웃음을 보는 고객들 마음도 편할 리 가 있을까.
백화점 갑질 손님
지난 달 인천의 백화점 귀금속 매장에 근무하는 직원 2명이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영상이 공개돼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영상이 처음 공개됐을 때 많은 이들이 고객이 무릎을 꿇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짓기 위해 직원들 스스로 무릎을 꿇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 직원들이 조금은 덜 친절했더라면, 덜 친절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면 어땠을까.

‘감정 노동자’들이 ‘감정 노동’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것은, 비단 이들의 권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고객인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과한 감정을 소비하는데서 오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자유가 부디 허락되길 바란다. 게다가, 우리 가족이나 친척, 친구 가운데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르바이트생이든) 감정 노동자가 적어도 1명 이상 있을 확률은 굉장히 높다. 

* 국내 감정 노동자는 560만~740만명, 전체 임금 근로자 10명 중 3~4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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