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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계엄포고령 1호1항 위헌 무효' 첫 결정…43년 만에 열린 재심 길

[취재파일] '계엄포고령 1호1항 위헌 무효' 첫 결정…43년 만에 열린 재심 길
올해 73살인 허 창균 씨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머리가 하얗게 쉰 백발의 노인이지만 43년 전의 허씨는 30살의 청년으로 철도청 4급 기능직 공무원이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평범하게 공무원 생활을 하던 허 씨에게 1972년 11월은 평생 잊지 못할 운명적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 1972년 가을 계엄령 시절의 공포…한 공무원 끌려가 고문에 허위 자백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당시 부산 철도청 마산기관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허 씨는 지프차를 타고 온 502 방첩대 소속 기관원 3명에게 영문도 모른 채 강제 연행됐습니다. 방첩대로 끌려 온 허 씨는 음침하고 살벌한 밀실에서 굵은 몽둥이로 온 몸을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약과였습니다. 뒤이어 전기고문을 당합니다. 전기고문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고 허 씨는 기억합니다. 온 몸이 녹아 나는 것 같은 악몽이 이어졌고 정말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허 씨만 끌려 온 게 아니었습니다. 허 씨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계모임 하던 친구 7명도 함께 붙잡혀 와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4차례에 걸친 전기 고문 끝에 허 씨는 수사관이 시키는 대로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본능밖에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 허 씨 친구와 계모임에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 직장 파면돼
 
허 씨와 계모임 친구들에게 붙여진 죄명은 ‘계엄법 위반’과 ‘협박’ 혐의였습니다. 1972년 12월 6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항소해 이듬해인 73년 1월 11일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그 해 7월 10일 대법원에서 형이 최종 확정됐습니다. 형 확정과 함께 다니던 철도청에서 파면도 함께 당했습니다.
당시 군사재판부가 허 씨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근거는 1972년 10월 17일 내려진 계엄포고령 제1호 1항입니다. 포고령 1호는 유신 헌법과 유신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공포되었던 ‘령’ 으로 계엄사령관인 노 재현 육군대장 명의로 발표됐습니다. 포고령 1항은 ‘모든 정치활동 목적의 옥 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 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 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수색, 구속 한다’ 고 공포 했습니다. 허 씨는 당국에 사전 허가도 받지 않고 친구들과의 계모임을 가졌다는 혐의로 포고령 1항을 위반해 유죄가 확정된 겁니다.
 
● 허씨, 43년 만에 재심 청구
40여 년간 은둔을 하다시피 세상과 단절해 살아 온 허 씨는 지난 2013년 12월 23일 창원지방법원 형사 항소부에 어렵게 재심청구를 했습니다. 이 사건은 3심까지 가서 형이 확정됐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재심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형사소송법상 예외 조항이 있습니다. 유, 무죄의 근거가 되는 새로운 명백한 증거가 나타나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형벌에 관한 법령이 당초부터 헌법에 위반되어 법원에서 위헌 무효라고 선언한 때에도 재심의 사유가 됩니다. 허 씨는 자신의 유죄 근거가 됐던 포고령 1호 1항에 대한 위헌 여부를 재심해 달라는 취지로 법원의 판단을 구했습니다. 법률의 경우 위헌 여부를 헌법재판소에서 결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령’은 일반 법원에서 위헌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 창원지법 포고령 제1호 1항 위헌 무효 판정…“군사상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송성준 취재파일
창원지법 형사 1부는 지난 16일 마침내 의미있는 결정을 했습니다. 허 씨의 재심 청구에 대해 유죄 근거가 됐던 ‘포고령 1항이 위헌 무효’라며 마침내 재심을 결정한 겁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먼저 군사상의 필요 여부를 따졌습니다.

당시는 유신체제 상황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당시 헌법 제 75조 1항에서 ‘대통령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명백한 군사상의 필요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또 포고령 1호의 근간이 되었던 구 계엄법 제 13조는 ‘비상계엄지역 내에서는 계엄사령관은 군사상 필요한 때에는 체포 구금 수색 거주 이전 언론 출판 집회 또는 단체 행동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포고령 1항에서도 ‘모든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 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 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위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수색 구속 한다’는 규정의 위헌 여부를 따졌습니다.

결국 재판부는 포고령 발표 당시 ‘군사상 필요’가 있었는지의 유무를 살펴봤습니다. 재판부는 ‘군사상 필요’라 함은 계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상당한 무력을 갖추고 있어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군사력의 동원이 필요하거나 상대방이 군이나 국가 기관에 고도의 현실의 현실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경우 등으로 좁게 새겨야 하는데 포고령 1호를 공포할 당시 1항에서 정한 바와 같은 조치를 취할 만한 군사적 필요성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구 계엄법이 정한 요건에 충족되자 않고 공포된 것이어서 위헌 무효라고 결정했습니다.
 
● “영장주의의 본질도 침해”
두 번째로 영장주의 위반 여부도 함께 따졌습니다. 재판부는 영장주의의 본질은 체포 수색 등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강제 처분을 함에 있어 사법권 독립에 의해 그 신분이 보장되는 법관이 구체적 판단을 거쳐 발부한 영장에 의하여야만 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영장주의를 완전히 배제하는 특별한 조치는 비상계엄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도 가급적 해서는 안 되며 설사 그러한 조치가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한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조속한 시간 안에 법관에 의한 사후 심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 했습니다.

따라서 포고령 1항은 어떠한 제약 조건도 두지 않고 법관의 구체적 판단 없이 수색 구속할 수 있도록 하고 이에 대하여 법관에 의한 아무런 사후 심사장치도 두지 않아 영장주의의 본질을 침해하였다는 점에서 위헌 무효라고 결정했습니다.

결국 요약하자면 포고령 1호 1항이 적법하려면 그 당시 상황이 군사적 필요가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는 점 그리고 영장주의의 본질을 침해해 위헌 무효라는 결정을 내린 겁니다. 창원지법이 이번에 내린 포고령 제1호 1항의 위헌 무효 결정은 처음입니다. 지난해 12월 서울고등법원이 포고령 제1호 5항 ‘유언비어 유포 금지’ 조항에 대해 위헌 무효 결정을 내린데 이어 1항도 위헌 결정을 받은 겁니다.

이 사건 재심청구를 담당한 서 은경 변호사는 “이번 결정은 1972년 당시 유신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공포되었던 계엄포고령이 위헌 무효라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결정”이라며 “앞으로 형 무효소송과 함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 허씨, 계엄법 위반에 대한 재심 길 열려…“43년 만의 명예회복 됐으면”
허 씨는 창원 지법의 재심 결정에 따라 앞으로 자신의 계엄법 위반과 협박 혐의에 대한 무효소송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또 이 결과에 따라 철도청을 상대로 파면 무효소송과 국가를 상대로 배상소송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지난 43년간 허 씨를 옥죄었던 계엄법 위반은 그에게 두고두고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허 씨는 전기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허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출소 후에도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전과자 낙인까지 찍혀 가족 모두가 마산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와 거의 은둔하다시피 하며 좌절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생계는 아내의 몫이었고요. 뒤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다행이지만 43년의 세월은 허 씨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기에 충분한 세월이었습니다. 타락한 권력에 의해 한 시민이 철저하게 망가진 또 하나의 사례겠지요.

허 씨와 함께 끌려갔던 나머지 친구들도 대부분 사망하고 이제 생존자는 두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도 허 씨와 함께 재심 판결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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