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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국정 교과서, 시대의 스승과 그 제자의 '슬픈 현대사'

[취재파일] 국정 교과서, 시대의 스승과 그 제자의 '슬픈 현대사'
그 무엇하나 마뜩잖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분들께 씁쓸하게도 감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시대의 스승'에 대해 알게 됐기 때문인데요. 덕분에 국정화 전환을 주장하는 세력이 가장 가리고 지우고 꾸미고 색칠하고 싶어하는 근현대사 교육이 왜 중요한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유일무이한 '총장 퇴진 반대' 운동이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눈물로 '굴욕적인 총장 퇴진 반대'를 외치며 모교 총장을 지키려고 했던 일은 독재정부 치하에서는 처음이었습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엔 대부분 '총장 퇴진' 운동이었지요. 학생들이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총장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구속된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신군부의 외압에 "학칙에는 총장에게 그런 권한이 없다"며 맞섰습니다.

그런 총장에게 1985년 2월 제자들의 졸업식은 자신의 강제 퇴임식이 됐습니다. 졸업생 답사를 읽어 내려가던 여학생은 답사를 써온 종이를 던지고 '총장님을 지키자'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총장은 졸업 축사이자 퇴임사로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대학을 정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광복군으로 활동하던 1945년 8월 20일 중국 산둥성에서 노능서(왼쪽), 김준엽(중간), 장준하(오른쪽)선생
故 김준엽 고려대 총장(1920~2011)은 일제 시대 학도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 탈출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영원한 광복군'입니다. 해방 이후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고, 1982년 7월부터 1985년 2월까지 2년 8개월 동안 고려대 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퇴임한 김준엽 총장을 국무총리 2번을 포함해 열두 번이나 정부 요직에 앉히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잡혀간 제자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관직에 몸담을 수 있겠는가"라는 이유였습니다.


▶ 참고1 :<나의 대학총장시절>(김준엽, 나남출판사)
▶ 참고2 : EBS 지식채널e '총장의 변(辯)' (2014.6.3 방송분)
김준엽 총장
김준엽 총장은 평생 역사를 가르쳐 온 저명한 역사학자입니다. 그가 아꼈던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현재 '국정 교과서' 집필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면서 고려대 총장과 고려대 재단 이사장 등을 거쳐 온 김정배 교수입니다. 김준엽 총장은 고구려사를 전공한 김정배 교수의 추진력과 행정력을 높게 평가해 총장 재직 시절 김정배 교수를 학교 핵심 보직인 교무처장에 기용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1년 향년 90세로 별세한 김준엽 총장 영결식에서 김정배 교수는 눈물의 조사를 낭독했습니다. 자신을 아끼고 키워준 스승을 보내며 "끊임없이 고위 관리 제의가 들어와도 사양하며 학문 세계를 지킨 인품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며 "조국 통일 유훈은 후학의 몫이니 걱정마시고 부디 영면하시길 빈다"고 말했습니다.

● 故 김준엽 고려대 총장 영결식 2011.6.10


▲ 영결식에서 조사 낭독하는 김정배 고려중앙학원 이사장(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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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제가 김준엽 총장을 알게 된 건, 이번 국정화 논란을 취재하면서였습니다. (국사가 필수였던 시절 대학입시를 치뤘고 '한총련 사태'로 폐허가 됐던 연세대 종합관을 봤고, 메이데이 전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학교를 다녔지만, 현대사 공부는 부족했음을 반성합니다.)

역사학계 학자들과 교수, 대학생들의 국정화 반대 선언이 이어지던 지난 14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우리 선배인 김정배 위원장이 지난달 160명의 고려대 교수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을 낸 모습과 정반대로 교과서 국정화의 총대를 메고 있는 모습이 부끄럽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극진한 존경을 표하며 언급했던 분이 바로 김정배 위원장의 스승 김준엽 전 총장이었습니다.

주무부처인 교육부도 "다양한 역사 관점을 균형있게 담도록 하겠다"며 국정 교과서 집필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와중에, 김정배 위원장은 오히려 "하나의 통일된 역사만 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며 정부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육부보다 더 국정화에 앞장서는 모습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재 국정화 논란의 핵심은 근현대사 100년 부분입니다. 이 100년 안에 포함되는, 30여 년의 세월을 두고 부녀 대통령이 나온 이 나라에서, 김정배 위원장이 말하는 '하나의 통일된 역사'는 '승자의 역사'가 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김준엽 총장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 정의,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시대의 스승' 김준엽 전 총장은 역사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소신처럼 평생을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양심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 스승 밑에서 1970년대에는 국정교과서 폐지를 주장했던 김정배 위원장이 지금은 '하나의 통일된 역사'를 앞장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김정배 위원장은 국사편찬위원장이기 이전에 고려대 사학과 교수입니다. 고대사 분야의 거목이기도 합니다. 고구려사 연구는 김정배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평가도 많습니다. 많은 고대사 전공 학자들이 김정배 위원장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김정배 위원장이 키워낸 제자들인 고려대 고대사 전공 교수 전원을 비롯한 고려대 한국사학과와 사학과 교수 전원도 이번에 국정 교과서 집필 거부 선언을 했습니다.  

세월이 아주 많이 지나서, 훗날 역사학자들이나 교과서 집필자들이 2015년 한국의 국정 교과서 사태를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요. '시대의 스승'과 '국정 교과서 책임자'가 된 제자의 '슬픈 현대사'마저도 기록되지 않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요즘입니다. 

▶ 참고3 : '고대 총장과 애제자, 무엇이 그들을 갈라놓았나'(한겨레)

 
<한국사 국정 교과서 제작 참여에 반대하는 고려대 역사계열 교수 선언서>

고려대 한국사학과, 사학과, 역사교육과,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들은 역사교육을 퇴행시키고, 나아가 교육 및 민주헌정질서의 가치를 뒤흔드는 정부와 여당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조치를 강력히 반대한다. 이에 따라 고려대 역사계열 교수들은 향후 진행될 국정 교과서 제작과 관련된 연구 개발, 집필, 수정 검토를 비롯한 어떠한 과정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역사교육의 발전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한국사 교과서는 최근 들어 정부와 여당에 의해 이념 논쟁과 정쟁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2013년 정부와 여당은 친일과 독재 미화로 지탄받은 교학사 교과서를 무리하게 통과시키며 검인정제도를 크게 훼손시켰다. 또한 억지춘양으로 통과시킨 교학사 교과서가 학계와 교육계로부터 질타를 받고 교육현장에서 사실상 채택되지 않자 끝내 국정화라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그간 역사학계와 역사교육학계, 중등교육의 책임자인 교육감과 교사, 역사전공 대학생과 대학원생, 시민단체 등은 지속적으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해 왔다. 또한 검인정제가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에 적합하다는 사실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비롯해 누누이 지적된 바이다. 지난 고려대 교수 성명에서 인문학, 사회과학, 나아가 이공계열 교수까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했던 이유도 이 조치가 지닌 반교육성, 반민주성, 반헌법성에 다수의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반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이 일방적으로 국정화를 강행하는 것은 집권세력의 당리당략적 이해 추구 외에 그 이유를 달리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새로 만들어질 국정 교과서는 정부 여당이 말하는 이른바 '올바른 한국사 교과서'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와 정부 여당이 그 기준을 제시하는 '편향된 교과서'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교과서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뀜에도 불구하고 1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이를 제작하겠다는 것은 스스로 '졸속 부실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번 고려대 교수 선언에서 우리는 정부 여당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국민 통합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확신시킬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기했었다. 이미 목도하고 있듯이 정부 여당의 무리한 국정화 추진이래 역사교육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가려는 사회적 논의는 실종된 채 구태의연하고 비상식적인 이념 대립만이 횡행하고 있다. 이 모든 갈등과 분열의 책임은 정부 여당에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고려대학교 역사계열 교수 일동은 학자적 양심과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된 일체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 번 명백히 밝히는 바이다.

2015년 10월 14일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사학과, 역사교육과 교수 전원 18명과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4명 등 22명 일동

강제훈 권내현 김경현 민경현 박대재 박상수 박현숙 송양섭 유희수 이병련 이진한 이홍종
정운용 정태헌 조명철 조영헌 조윤재 최광식 최덕수 최종택 허은 Leighanne Y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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