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교과서 국정화,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

교과서 국정화 추진세력에 대한 수학적 귀류법에 의한 분석

[취재파일] 교과서 국정화,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
최근 새누리당과 자유경제원 등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세력 사이에서  '자유민주주의'란 표현이 부쩍 늘었다. 기존 검정 교과서 대부분이 좌파적 색채가 강해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거다. 그러니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해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면 자유민주주의자, 반대하면 좌파이고 빨갱이라는 논리다.

교과서 국정화 추진세력이 참말로 자유민주주의자인지, 수학적 귀류법을 활용해 증명해보자. ‘수학’이란 단어에 당황하실 필요는 없다. 검정 교과서로 중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충실히 공부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도 문과 출신이다.)

[전제]
1. 모든 사람은 자유민주주의자이거나 또는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다.
2.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정치원리다. 즉 자유민주주의 = 자유주의 ∩ 민주주의.

[명제]
교과서 국정화 추진세력  ≠ 자유민주주의자

[증명1]
귀류법에 따라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자유민주주의자>로 가정한다. <자유민주주의 = 자유주의 ∩  민주주의>이므로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은 우선 자유주의자이어야 한다.

자유주의는 국가 개입과 시장 독과점을 멀리하고 자유 경쟁 시장 체제를 추구한다. 이는 상품 뿐 아니라 사상의 영역에도 해당된다. 일찍이 자유주의자로 이름을 떨쳤던 존 밀턴의 <사상의 공개시장>이다.

현재의 검정 교과서 체계는 사상의 공개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검정만 통과하면 어떤 교과서건 시장에 진입해 자유롭게 채택 경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자유주의자라면 응당 사상의 공개시장과 경쟁에 따른 '자기 수정의 원리'(self-righting principle)를 지지해야 한다. 하지만 교과서 국정화 찬성론자들은 이 공개 시장을 부정하고 나아가 폐쇄하고자 한다. 모순이다.

∴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즉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 ≠ 자유주의자.
 
<쉬어가기>
위대한 자유주의자 존 밀턴은 이렇게 갈파한 바 있다. “진리와 허위가 맞붙어 논쟁을 하도록 하라. 누가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진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 존 밀턴 <아레오파지티카>


<또 다른 증명 1>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이 양쪽 엄지를 추켜세우는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채택률이 0.1%에 불과하다. 그들이 중립적이라고 평가하는 2개 교과서까지 합쳐도 채택률은 10% 대에 불과하다. ‘올바른’ 교과서가 검정 교과서 시장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통상 자유주의자들은 특정 사회 문제를 분석할 때 개인에 방점을, 사회주의자들은 구조에 방점을 둔다. 투철한 자유주의자라면 교학사 교과서 실패 원인을 (항상 주장했던 것처럼) 무능, 게으름 즉 노력 부족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노력이 부족해 경쟁에서 졌다면 더 노력을 해야 하고, 나아가 노오오오력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도 안 된다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말처럼 “좌파 필진과 교사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안목을 키우고, 그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설득해 좌파적으로 먹었던 마음을 바꾸는 능력을 기르고 발휘”했어야 한다. 그래도 채택률이 안 오르면  “인생에 좋은 경험” 이라 생각하고 “방법이 없다”고 쿨하게 체념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자유주의자답게 개인의 자유와 능력, 노력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교과서 국정화 이슈에 대해서만큼은 난데없이 ‘구조’가 잘못됐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좌파 교사와 학자들이 장악하고 있어 ‘시장 실패’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왜곡된 구조’라는 것이다.

체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판에, 시장의 룰이 잘못됐으니 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그동안 그들이 말해왔던 자유주의와 상당한 괴리가 있다. 그들 말대로 남탓, 사회탓을 하며 규칙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反자유민주주의자 즉 빨갱이들이나 하는 말이 아니었던가.

참된 자유주의자는 경쟁에서의 패배를 구조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은 ‘올바른 교과서’의 실패를 구조 탓으로 돌리고 있다.

∴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쉬어가기>
사기의 룰을 디테일하게 묘사해 화제가 됐던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룰을 깨고 총을 들고 나타난 백윤식에게 주인공인 박신양은 이렇게 일갈했다. “이런 거 들고 다니면 (이미) 당신 진 거야.”

[증명2]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 = 민주주의자>로 가정한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다원주의는 개인의 가치관이나 이념, 목표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현행 검정 교과서 체계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포용하고 있어 민주적 원리에 부합한다. 하지만 국정화는 단 하나의 관점과 해석만을 강요한다. 심지어 이름에 ‘올바른’ 이란 표현을 집어넣어 다른 관점은 다 틀렸다는 뉘앙스까지 풍기고 있다. 민주주의 원리와는 지구에서 화성만큼이나 동떨어진 얘기다. 따라서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이 찬성론자들이 민주주의자라는 가정은 모순이다.

∴ 교과서 국정화 찬성론자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즉 교과서 국정화 찬성론자 ≠ 민주주의자
 
<쉬어가기>
지난 2008년 한국을 방문한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은 자신을 향해 반미 시위를 벌이는 시위대를 두고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원래 좀 시끄러운 (noisy) 것이다. 시끄러운 민주주의가 조용한 독재보다 나은 것 아니냐.”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진정한 미국 자유민주주의자의 클래스다’라고 평가했다. 라이스 전 장관이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면 “시끄러운 검정 교과서 체계가 조용한 국정 교과서 체계보다 나은 것 아니냐”고 하지 않았을까.

<또 다른 증명 2>

민주주의의 또 다른 원리는 다수결과 소수의견 존중이다.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찬반 양론이 팽팽하다. 심지어 최근 일부 여론 조사에선 반대 여론이 더 높게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은 새누리당 특강에서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위대한 게 아니라 의사 결정의 하나의 방식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은 여기에 박수로 격한 공감을 표시했다. 이는 비 민주적 의사 결정 방식도 가능하다는 뜻으로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교과서 국정화 찬성론자들이 민주주의자라는 가정은 모순이다.

∴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즉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 ≠ 민주주의자.

<결론>
여기까지의 논증에 따라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이 자유주의자이거나 민주주의자라는 ‘부정 가정’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부정 가정이 거짓이므로 귀류법에 따라 최초 명제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  ≠ 자유민주주의자> 는 참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혹자는 전체주의자, 혹자는 권위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부분은 이 글의 증명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도록 한다.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좌/우 또는 보수/진보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훨씬 더 크고 심각한 문제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은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자로 칭하고 있지만, 국정화 추진은 '진짜' 자유민주주의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현행 검정 교과서 상당수가 편향돼 있다는 의견은 누구나 주장할 수 있고 또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편향을 바로잡겠다며 국정화, 단일화를 추진하는 행태는 자유민주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런 괴리는 아마도 국정화 추진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의 뜻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반공, 반북, 반빨갱이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자가 반공, 반북, 반빨갱이 입장을 취할 수 있으나 반공, 반북, 반빨갱이라고 해서 곧바로 자유민주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소련을 침공했다고 해서 나치가 자유민주주의자는 아닌 것과 같다. 아주 기초적인 논리학이다. 교과서 국정화 추진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의 뜻을 곡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 상당수가, ‘자유민주주의’의 비슷한 말은 ‘자본주의’, 반대말은 ‘공산주의’라고 가르쳤던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사회과목 국정 교과서를 맹목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이 아닐까 강하게 의심된다. 하지만 이 명제는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아직까지는 추측에 불과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교과서 국정화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유사 자유민주주의' (pseudo-liberal democracy), 즉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의 문제다.

ps. <쉬어가기> 코너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삽화를 준비하지 못한 점,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