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머는 특히 고전과 낭만주의 시대 작품들뿐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 거장의 작품들을 두루 아우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로 유명한데, 이토록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솔리스트 가운데 크레머만큼 현대 작곡가의 작품을 다양하게 소화해낸 연주자는 없다고들 얘기합니다. 그가 아스트로 피아졸라(Ástor Pantaleón Piazzolla)를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 칭하고 그에 대한 찬사를 담은 앨범을 내놓자 클래식 연주자들 사이에 탱고 연주 바람이 불기도 했죠. 이렇듯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자유분방함은 그를 다른 거장들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입니다.
거장과 아이돌의 만남이라…언뜻 들으면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크레머도 앙상블 디토도 모두 도전적인 연주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장이란 수식어 외에 ‘혁명가’라는 별명도 가진 크레머는 고희를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공연에 앞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크레머는 ‘여전히 새로운 연주기법이나 장르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짧지 않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 짧은 인생을 최대한 많은 경험으로 풍성하게 채우고 싶습니다’라며 말이죠.
앙상블 디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들의 등장 자체가 국내 클래식계에선 상당히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매우 상업적인 전략이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관객 친화적인 레퍼토리 개발과 참신한 무대 연출 등으로 앙상블 디토는 이제 국내 클래식 공연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연주자들도 나이를 먹고 팬들 또한 10 20대뿐만이 아니어서 아이돌을 넘어선 연주자 그룹으로 성장한 느낌입니다.
그런 점에서 크레머와 앙상블 디토의 만남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여기에 기돈 크레머가 자신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해 창설한 오케스트라 크레메라타 발티카(Kremerata Baltica)까지 함께 하니 공연은 한층 풍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발틱 국가 출신의 젊은 연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로, 크레머의 색깔을 가득 담은 활기 넘치는 공연을 선보여왔습니다.
비올라의 리처드 용재 오닐과 첼로의 마이클 니콜라스(Michael Nicolas)가 합류한 다음 곡(슈니트케 ‘셋을 위한 협주곡’)은 작곡가 슈니트케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마지막 곡(모차르트 ‘세레나타 노투르나 D장조)에서는 한국동요 ‘봄나들이’가 들어간 친근하고 유연한 편곡의 매력이 두드러집니다. 두 개의 짧은 앙코르 곡은 기돈 크레머 개인의 풍부한 연주실력을 새삼 부각시키며 그를 찾아 온 관객들을 반갑게 합니다.
60대 거장은 젊은 시절만큼의 전율할 에너지를 뿜어내지는 않았지만 크레머다운 선곡과 무대 연출을 통해 여전한 자신만의 매력을 선보였습니다.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 그리고 앙상블 디토 멤버들의 매력이 어우러져 하나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연이었습니다. 이토록 발랄하고 유머가 넘치는 클래식 공연이라니, 거장과 아이돌의 만남에는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