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첫 주 2백만 관객에 육박한 영화 사도.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다룬 영화가 인기몰이를 시작 했습니다. 세종과 이순신 말고는 역사는 관심 없다는 분들도 이 영화를 흥미롭게 볼 수 있도록 꼭 필요한 것만 뽑아서 지금부터 알기 쉽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영화 속 아버지 영조(송강호)는 마흔이 넘어 남자 아이(유아인)를 얻습니다. 수명이 짧았던 그 시절에 아주 귀한 늦둥이죠. 그토록 기다렸던 왕위 후계자였으니 영조의 사랑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자의 나이 3세였는데, 행동이 의젓하였다.” - 영조 13년 2월 14일
게다가 아들은 똑똑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아들을 위해 영조는 직접 책을 만들어 공부를 가르칠 정도로 지극 정성이었습니다. 늦둥이를 가진 탓이었을까요? 아버지는 왕위를 물려주는 일을 서두릅니다. 세자가 14살이 되었을 때 나라의 정치를 맡깁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가까웠던 부자 관계에 조금씩 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의관의 말을 듣건대, 세자가 근래에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상이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 영조 31년 4월 28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질책은 점점 늘었고, 아들의 부담도 점점 커졌습니다. 심지어 아들은 정신병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병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세자의 부인은 세자가 자신에게 바둑판을 던져 왼쪽 눈을 실명할 뻔 했다고 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였느냐?”
“마마께서 사랑해 주지 아니하시기에 서글프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서 화가 되어 그러합니다.” (한중록 발췌)
아들과 아버지의 마지막 기회에서는 아들은 그간 쌓였던 아쉬움을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이미 둘 사이는 너무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1762년. 이 집 안의 안타까운 비극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세자를 싫어했던 정치 세력(노론)의 한 하수인(나경언)의 입에서 시작됐습니다.
“후궁을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성문 밖으로 나가 놀았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은 영조에게 세자의 비리를 고발합니다. 세자를 모함한 죄로 나경언을 죽이지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불신은 더욱 커졌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버지 영조는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그 때가 윤 5월 13일이었습니다. 영조는 아들의 왕위 계승자 지위를 박탈하고 뒤주(쌀통)에 세자를 가둡니다. 좁은 뒤주에서 밥도, 물도 못 먹은 아들은 결국 8일만에 숨을 거둡니다. 41살에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얻은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자의 부인과 어린 아들은 남편과 아빠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 누군가는 영조가 어떤 형벌에도 나오지 않는‘뒤주 가두기’란 벌을 내린 이유는 역모죄로 몰려 참형을 받게 된 아들의 마지막 명예라도 지켜주기 위해서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13일의 일을 어찌 좋아서 했겠느냐? 너는 무슨 마음으로 일흔 살 먹은 아비를 이런 일을 당하게 하느냐” -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명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뒤 호를 회복 시키고, 장례도 치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아들에게 내린 시호는‘사도’입니다.
생각할 사
슬퍼할 도
(SBS 스브스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