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살인' 피의자 김일곤은 범행 후 8일이 되도록 행방이 묘연했지만 경찰의 예상과 달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습니다.
김씨는 오늘 아침 8시 반쯤 서울 성동구의 한 동물종합병원에 처음 찾아왔습니다.
김씨는 문을 잡고 흔들면서 "열어달라"고 말했고, 문을 걸어 잠근 채로 청소하던 간호사는 "지금은 진료하지 않으니 오전 9시 넘어서 다시 오라"며 김 씨를 돌려보냈습니다.
김 씨는 순순히 돌아갔다가 오전 9시 15분쯤 다시 병원에 왔습니다.
그러고는 대뜸 병원장에게 "키우는 10㎏짜리 푸들이 아프다"며 "다른 동물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도 차도가 없고 밥도 먹지 못해 안락사를 시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10㎏가 될만한 푸들 종인 자이언트 푸들이 흔치 않은데다 김 씨는 개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원장은 "지금 안락사 약이 없을뿐더러 보지도 않은 개를 안락사시킬 수는 없다"며 김 씨에게 개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 씨가 "그럴 수는 없는데, 안락사 약을 처방해 받으면 제가 안락사를 할 수 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원장은 "약을 그냥 드리는 건 더더욱 안 된다"라며 인근 왕십리에 있는 큰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그제야 김 씨는 포기한 듯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돌아간 줄 알았던 김 씨가 오전 9시 50분께 다시 병원에 나타났습니다.
역시 개는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왜 큰 병원에 가지 않고 다시 왔느냐"는 원장의 말에 김 씨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집사람이 개를 데리고 올 건데 여기서 기다리겠다"며 손님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씨가 갑자기 흉기를 꺼내 들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원장과 간호사를 향해 "다 모여서 나란히 서. 약 내놓으라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원장이 "진정하라"며 김씨를 달래다 뒷걸음질치며 간호사와 함께 미용실로 연결된 문으로 재빨리 도망가서는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미용실 안에서 작업 중이던 미용사도 원장과 간호사와 합세해 미용실 문을 꼭 붙들고는 바깥에서 문을 열려는 김씨와 힘 싸움을 벌였습니다.
미용사가 휴대전화로 경찰에 신고하자 "전화하고 있잖아!"라는 김씨의 짜증 섞인 고함이 들린 후 곧 조용해졌습니다.
3∼4분 뒤 경찰이 병원에 도착했고, 미용실에 숨어 있던 이들은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즉시 지구대 순찰차가 김씨를 찾아 나섰고, 순찰차 한 대가 도망가던 김씨를 발견했습니다.
성수지구대 김성규 경위 등 경찰관 2명이 김 씨에게 접근해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김씨는 다시 흉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김 경위 등이 필사적으로 김 씨와 엉겨붙어 넘어졌고, 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김씨의 칼을 빼앗았습니다.
결국 김씨는 오늘 오전 11시 5분쯤 검거됐습니다.
원장은 "경찰이 수배전단을 보여주고 나서야 남자가 김씨인 줄 알았다"며 "처음부터 험상궂게 굴진 않았지만 개업 이래 안락사 약을 달라고 한 사람은 처음이라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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