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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은행 직원에 '딱 걸린' 보이스피싱 인출책

[취재파일] 은행 직원에 '딱 걸린' 보이스피싱 인출책
“여보세요?”
-저는 첨단범죄 수사 1팀 OOO 검사고요 예 이번 명의도용 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도 걱정이 돼서 다른 데 전화라도 해보려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지금 저를 의심하고 있다는 자체가 저도 사람인지라 좀 기분이 나쁘네요.


수사기관을 사칭한 ‘연기력’은 기본, ‘적반하장’은 테크닉입니다. 하마터면 돈을 잃었을 피해자들이야말로 정말 기분이 나빠질 뻔 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소개돼 많이 알려진 보이스 피싱의 ‘정석’이라지만 막상 당하는 사람이 ‘나’라는 짐작을 하기는 쉽지 않은 법입니다. 경북 안동에 사는 박 모 씨도 그랬습니다.

어느 날 서울중앙지검 첨단수사과 검사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습니다. 대뜸 전화를 걸어온 낯선 사람은 박 씨의 계좌가 범죄에 사용됐다며 임시로 생성된 다른 계좌에 모든 돈을 이체해 ‘깨끗한 돈’인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얘길 갖가지 복잡한 방식으로 돌려 설명합니다.

경찰서를 출입하는 기자들은 다양한 사기 사건을 접합니다. 제 출입처는 소위 '강남라인'이라 불리는 7개 구의 경찰서인데, 구마다 조금씩 특색이 다르긴 해도 역시 '사기' 범죄는 어디서나 끊이질 않습니다. 다양한 사기 범죄 가운데에서도 보이스 피싱, 그러니까 전화 금융사기는 여전히 그 위용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5년 동안 보이스 피싱 피해액수는 3천7백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5년 동안 발생한 건수는 3만 천 여 건으로 올해 상반기에만 4천7백여 건, 확인된 피해액은 600억 원이 넘습니다.

최근 금융감독원과 경찰청은 공동으로 운영하는 '보이스 피싱 지킴이 홈페이지'에 전화 금융 사기범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긴 <그놈 목소리>란 코너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국민들이 실제 사기범들의 목소리를 듣고 사기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5월에는 300만 원 이상의 금액을 입금했을 때, 자동화기기(ATM)에서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대기해야 하는 시간을 10분에서 30분으로 늘리는 '지연 인출제'를 적용하기도 했는데요. 가장 최근인 이달 2일에는 이 제도를 더 강화해 인출 시간이 지연되는 금액 한도를 기존 300만 원에서 100만 원으로 낮췄습니다.

그러나 수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지키려는 자’에 맞선 ‘빼앗으려는 자’의 수법도 정교해졌습니다. 종래의 현금 출로였던 ATM 인출이 여의치 않자, 요즘 보이스 피싱의 ‘트랜드’는 통장 명의자를 통한 ‘창구 인출’로 굳혀졌습니다.

지연 시간도 있을뿐더러 1일 인출 금액 한도가 600만 원인 ATM 인출과 달리, 통장 명의자가 창구에서 은행 직원을 통해 인출할 수 있는 금액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요즘엔 이른바 ‘총책’으로 뛰는 선수들은 벼룩시장이나 인터넷 광고 글을 통해 통장 명의를 빌려주고 인출까지 해 줄 사람을 구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을 전달해 주면 한 건당 백만 원씩 로열티를 주겠다고 하는 식입니다.
박 씨의 경우에도 ‘전화 거는 선수’와 ‘뛰는 선수’가 따로 있었습니다. 25살 김 모 씨는 수수료를 떼어 준다는 인터넷 광고 글을 보고 자기 명의의 통장을 피해자 박 씨의 돈이 거쳐 갈 ‘통로’로 제공합니다.

김 씨가 총책의 연락을 받고 은행 창구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도 박 씨는 계속 ‘그 놈’과 통화합니다. 통화 내용을 보면 유혹, 협박, 어르기, 재촉 등 각종 기술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집니다. 마침내 의심스러워하던 박 씨도 3천만 원을 김 씨의 계좌로 입금하고 맙니다.

하마터면 비극이 될 뻔 했던 사건을 막은 건 눈치 빠른 은행 직원들이었습니다. 농협은행 서울 강북 삼양동지점 송애남 과장은 평소 거래가 없던 계좌에 막 입금된 돈을 찾으려던 김 씨에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돈의 용처를 물어봤습니다.

어눌한 대답. 우물쭈물한 태도. 창구에서 직접 인출을 받으려면 돈을 어디에 사용할 건지 간략하게 기입하는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송 과장은 여기서 머뭇거리는 김 씨의 태도가 결정적으로 의심스러웠다고 말합니다.

송 과장과 다른 은행 직원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은행 본점에서는 피해자 박 씨의 남편, 가족들에게 연락해 보이스 피싱 사실을 확인받았고, 경찰에 신고해 현장에서 김 씨를 검거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 강북 경찰서는 송 과장을 포함해 발 빠른 대처로 인출책을 검거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은행 직원 4명에게 감사장을 수여했습니다.

수사기관의 노력이 빛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14일) 발표된 금융감독원의 5대 금융악 척결 성과 자료에 따르면 사기 피해액은 지난 하반기 월평균 337억 원에서 올해 261억 원으로  22.5% 감소했습니다. 기상천외한 ‘기술’이 들어간다 해도 보이스 피싱 사기범들이 결국 노리는 건 바로 피해자들의 ‘마음’과 ‘심리’입니다.

무조건적인 편의와 무리한 요구는 한번쯤 의심해 볼만 합니다.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결론까지야 아니더라도 눈치 빠른 은행 직원들의 스마트함에만 통장의 운명을 모두 맡길 수야 없겠지요. 하늘은 높고 푸르고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이 ‘배신의 계절’이 되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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