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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뮤지컬 '명성황후'와 '아리랑'

[취재파일] 뮤지컬 '명성황후'와 '아리랑'
광복 70주년 8.15를 맞아 1930년대 항일투쟁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이 극장가 흥행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공연계에서도 당시의 우리 역사를 다룬 작품들이 잇따라 무대에 올려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라 할 수 있는 대작들도 포함돼 있는데, 대표적인 게 ‘명성황후’와 ‘아리랑’입니다.
‘명성황후’는 많은 분들이 한번쯤은 들어봤을, 국내 대표적인 창작뮤지컬 작품입니다. 1995년 초연을 해 올해 공연은 초연 20주년 기념공연이기도 합니다. 한국 창작뮤지컬계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윤호진 연출가의 작품으로, 올해 공연은 김소현, 신영숙 두 배우가 더블캐스팅 돼 ‘명성황후’ 역을 맡았습니다.
이야기는 1866년, 15살 소녀 민자영이 고종과 혼례를 올리고 궁에 들어오면서 시작됩니다. 이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임오군란, 갑오개혁, 삼국간섭 등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하며 구한말 혼돈의 30년 역사가 무대 위에 펼쳐집니다. 마지막엔 일본인들이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다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죽은 이들이 부르는 ’백성이여 일어나라‘ 합창으로 극은 마무리됩니다.

백성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이천만 신민 대대로 이어 살아가야 할 땅
한발 나아가면 빛나는 자주와 독립
한발 물러서면 예속과 핍박
용기와 지혜로 힘 모아
망국의 수치 목숨 걸고 맞서야하리.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풍전등화 조국의 운명 앞에 비참한 죽음을 맞은 명성황후의 마지막 외침에는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힘이 있습니다. 비장한 노래는 웅장한 무대 연출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역사왜곡 논란을 잠시 접어 두고 뮤지컬 속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민족주의적 감상에 사로잡혀 마음속에 울분이 솟구치는 걸 느끼게 됩니다.
물론 명성황후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나라'가 백성들이 지키고 싶었던 '나라'와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구한말 백성들의 피폐했던 삶과 위정자들의 가혹했던 처사를 볼 때 황후의 소중한 '나라'는 아마도 '이씨 왕조의 존속'에 방점이 찍혀 있으리라 심증이 들면 씁쓸한 뒷맛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반면 아리랑은 전혀 다른 세상, 민초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올해 처음 무대에 오른 신작 뮤지컬인데, 제작기간 3년, 제작비 50억 원이 투입된 대작이라는 점 외에도 400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기획 단계부터 관심을 모았습니다.
각색과 연출은 요즘 공연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연출가 중 한 명인 고선웅 씨가 맡았습니다. 과감한 생략과 단순화를 거쳐 2시간 40분 분량의 무대작품으로 재탄생한 뮤지컬에는 ‘애이불비(哀而不悲)’ 즉 슬프지만 겉으로는 그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고선웅식 연출 철학이 녹아 있습니다. 원작의 무게가 버거운 듯 연출가의 호흡은 때때로 가빠 보이고 인물들은 다소 밋밋해졌지만, 원작이 갖는 품격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적 배경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즈음한 시기부터 일제 식민지배가 한창이던 1920년대까지입니다. 이야기는 전북 김제평야를 배경으로 평범한 이들의 소박한 삶에서 출발하지만, 무대는 이내 다양한 인연으로 엮인 7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만주의 거친 벌판으로 확장돼 나갑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이도 있고, 일본군의 밀정이 돼 그들을 뒤쫓으려 길을 떠나는 이도 있습니다. 부모의 빚잔치를 위해 단돈 20원에 하와이 농장에 인부로 팔려가는 이도 있습니다. 사연은 각자 다르지만 그들이 고향땅을 떠나며 함께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군산역을 배경으로 한 합창곡 '어떻게든‘입니다.

떠난다고 한들 떠나질 땅이여
잊는다고 한들 잊혀질 땅이여
안 떨어지는 발길을 돌려
떠나지만 떠나가지만 돌아와야 혀
어떻게든 어떻게든 어떻게든

기사를 쓰며 몇 번이고 이 곡을 듣게 됐는데, 번번이 울컥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자신과 가족, 함께 자란 친구와 이웃, 그리고 황금빛 햇살과 푸르던 들녘의 기억…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땅', 그래서 잊으려 한들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그 '땅'이 그들에게는 '나라'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었을까요? 수많은 민초들의 한과 설움이 진도아리랑 가락에 실려 무대를 채웁니다.
속 보이는 ‘애국주의’ 마케팅은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들입니다. 거친 역사의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남았습니다. 100년 전 이 땅을 살다 간 이들의 박제된 고통과 슬픔이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제가 느꼈던 그 뭉클함을, 아마도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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