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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

차가운 감동의 연극 '잘자요 엄마'

[취재파일]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
'잘자요 엄마'는 '엄마와 딸'에 대한 또 다른 연극입니다. 역시 대학로에서 한창 공연 중인데, '친정엄마'와 마찬가지로 함께 찾아오는 모녀 관객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엄마와 딸'의 얘기라는 소재 정도뿐.
 
'친정엄마' 속 엄마와 딸은 모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음 직한 이들입니다. 그 둘의 관계 또한 전형적이고 보편적이며, 극의 주된 사건 모두, 우리가 살면서 일반적으로 겪는 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국 작가가 쓴, 전형적인 한국 엄마와 딸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든 극 속 모녀의 정서에 공감하고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잘자요 엄마'는 1983년 뉴욕에서 초연된, 미국의 여성 작가 마샤 노먼(Marsha Norman)의 희곡으로 만들어진 연극입니다. 극 중 엄마의 이름은 델마,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설정된 딸의 이름은 제시입니다.

한국적 모녀 관계와는 조금 다른 이들의 관계와 정서 때문인지, 아니면 이 희곡이 지극히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객 중에는 공감과 감동 대신 얼떨떨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게 됐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모녀 이야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다면, 이 극의 서늘함과 날카로움에 적잖이 당황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어느 토요일 저녁, 엄마는 한가로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딸은 분주하게 자신의 방과 부엌, 다락을 오갑니다. 한동안 부산을 떨던 딸은 엄마에게 말합니다. 오늘 밤 아버지의 권총으로 자살을 하겠다고. 그리고 권총이 발사될 때까지 무대 위 시간과 객석의 시간은 같이 움직입니다. 무대엔 장소의 변환도, 시간의 생략도 없습니다.
 
당신이 엄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딸이 죽는다고 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다 큰딸을 힘으로 막을 수도 없고, 말로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엄마는 딸을 말을 애써 농담 취급하며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음식을 해주거나 재미있는 일을 같이 해보자며 달래보기도 합니다. 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화를 돋우기도 하고, 죽음은 평화로운 게 아닐 거라며 겁을 주기도 합니다.
 
이 절박한 상황 속 대화를 통해 우리는 모녀 관계의 적나라한 단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절망과 외로움에 힘들어하는지 공감하지 못합니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그간의 심리적, 정서적 간극을 메워보고자 대화를 나눠보지만 이 또한 겉돌기만 할 뿐입니다.
 
대화가 벽에 가로막힐수록 둘은 서로의 상처와 치부를 자극합니다. 서로에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 하고 싶었지만 차마 뱉어내지 못했던 비난들…대화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만들기는커녕 사랑하는 사람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무력감만 키울 뿐입니다.
 
딸 제시는 절규합니다. '나한텐 엄마가 전부인데 엄마 하나로는 충분치 않다면? 엄마만 없으면 나머지는 다 견뎌낼 수 있는 일이라면?' 엄마 델마는 안타까움 속에 말합니다. '네 곁에는 평생 이 엄마가 있었는데, 너는 그토록 혼자였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니?…아가, 날 용서해다오. 난 네가 내 것인 줄 알았어'.
 
이 연극이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간관계의 모순과 한계는 굳이 모녀관계에만 국한된 건 아닐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 연극은 이 현실을 또 한 번 직시하고 각성하게 함으로써 관객에게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감동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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