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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너무나 상투적인…그러나 결국은 울고 만다

뜨거운 연극 '친청엄마' 이야기

[취재파일] 너무나 상투적인…그러나 결국은 울고 만다
지방의 어느 농촌 마을,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 엄마는 그저 희생과 헌신으로 어린 자식들을 키워냅니다. 말 그대로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입고 싶은 거 못 입고 그렇게 아들딸을 교육시키고, 시집 장가를 보냅니다. 자녀가 장성한 뒤에도 서울 나가 살며 얼굴 보기 힘든 자식들을 위해 철마다 직접 키운 작물이나 새로 만든 밑반찬을 그들의 손에 들려 혹은 지인의 차편에 실어 보냅니다.
 
아버지는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농사를 짓지만, 작은 땅 일궈봤자 가족들 입에 풀칠이나 할 뿐 자식들 대학교육 시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안 좋은 경우라면 무책임한 한량이거나 방탕한 난봉꾼이어서 처자식 고생이나 시킬 따름입니다. 분명한 건 아버지가 전자이든 후자이든, 엄마는 손에 물 마를 날 없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 걱정과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익숙하신가요? 제게는 눈 감아도 절로 떠오르는 플롯입니다. 제가 청소년기에 그리고 20대에 읽은, 한국 문학 속 '엄마와 딸'의 얘기는 대부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다양한 소재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인 '나'의 환경적 특성의 하나로 부모가 묘사될 때는 더 다양한 경우가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엄마'의 얘기, 특히 '엄마와 딸의 관계' 얘기가 작품의 핵심 소재로 등장할 때는 위와 같은 엄마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는 했습니다.

요즘 대학로에서 한창 공연 중인 작품 중에 '친정엄마'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방송작가 출신 고혜정 씨가 2004년 발표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 연극은, 2007년 초연된 뒤 2013년에 이어 올해 또다시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고 작가는 비슷한 설정의 모녀관계를 바탕으로 '친정엄마와 2박 3일'을 썼고 이 또한 영화와 연극 등으로 만들어진 바 있어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작품일 겁니다.
 
연극 '친정엄마' 또한 앞서 언급한 모녀관계의 상투성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못한'이 아니라 '않는'이라고 표현한 건 이 극이 '어쩌다가'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이런 상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에서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대단히 큰 결함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보는 내내 마음이 울컥울컥 하고 자꾸만 눈물을 훔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극 중 엄마가 '나중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너 같은 딸년 낳아서 키워봐라' 할 땐 엄마에게 한 잘못들이 떠올라 움찔하게 되고, 극 중 엄마가 '금을 준들 너를 사랴, 은을 준들 너를 사랴. 청아 내 딸 청아, 공양미 삼백 석에 너를 팔아 눈을 뜬들 무엇하랴' 노래를 부르면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극 중 딸이 '문득 돌아보니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 엄마가 더 늙어 죽게 된다면...엄마가 죽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데, 엄마가 죽고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까요...'엄마'하고 소리 내어 부르고 싶으면 어쩌나, 엄마가 나에게 잘해주던 생각이 새록새록 나면 어쩌나, 자다가 문득문득 엄마 생각나면 난 어쩌나' 독백을 이어가는 동안 제 마음 속에도 걱정과 두려움이 커집니다.
 
딸이 '아 됐어, 한끼 안 먹는다고 죽어?', '나 바빠, 할 말 없으면 끊어'하고 퉁명스럽게 말을 할 때면, '왜 이래, 창피하게', '정말 내가 엄마 땜에 못살아'라며 핀잔을 줄 때면, 또 '엄마는 나에게 뭘 그렇게 잘 해줬다고 그래!', '그러게 안 낳았으면 서로 좋았잖아'하고 화를 낼 때면 미안함과 후회의 감정이 커집니다. 죄책감이 밀려듭니다.
 
그 죄책감은 딸의 마지막 독백과 닿아 있습니다. '엄마...엄마는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서...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나이가 몇 살이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자녀가 있든 없든 상관 없이, 모두의 마음에 와 닿는 연극입니다. 와 닿을 수밖에 없는 극입니다. 창작물로서의 가치와 별개로 말이죠.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며 마음을 뜨겁게 하고 눈물을 흘리고 싶은 분들에게는 추천할 만한 연극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걸 덧붙이자면,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도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만 해도 이런 식의 상투성을 지난 엄마 캐릭터에 온전한 감정이입을 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영화 '클래식'이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묘사하는 학창시절은 그 자체로 흥미롭긴 하지만, 제게는 할 얘기가 많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건축학개론'이 나오고 나서야 저와 친구들은 '그땐 그랬지'하며 더 많은 얘기를 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 엄마와 나의 관계'를 그려줄, 앞선 한 세대가 그려놓은 엄마의 상투성을 깨줄 그 다음 이야기를, 독자로서 그리고 관객으로서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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