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홀린 줄 알았어요"…전화 몇 통으로 사기당한 피해자들

[취재파일] "홀린 줄 알았어요"…전화 몇 통으로 사기당한 피해자들
대낮에 성인 남성 두 명이 서울 강남구 압구정의 한 주차장에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차를 파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차를 사려는 사람입니다. 차를 사려는 사람은 차를 파는 사람이 실제 차주인지 챙겨온 서류를 꼼꼼히 살펴봅니다. 인감 증명, 신분증 모두 확실합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계약서를 쓰고 서명합니다. 같은 금액에, 같은 차량입니다. 차를 사려는 사람은 차를 팔려는 사람에게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이 두 남성은 약 1시간 후 본인들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뭔가에 홀린 것 같았어요." 대낮의 미스터리, 이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사건은 지난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고차 거래 사이트에 자신의 SUV 차량을 팔기 위해 판매 글을 올려둔 박 모 씨는 한 50대 남자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중고차 딜러라고 소개한 이 남성은 시가보다 조금 더 비싼 값을 쳐주겠다며 박 씨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합니다. 화려한 언변으로 박 씨의 신뢰를 얻은 50대 남자는 본격적으로 거래를 개시합니다.
비슷한 무렵, 경기도에서 중고차 매매 영업을 하는 딜러 김 모 씨도 이 50대 남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남자는 차량의 사양을 죽 열거하면서 시가보다 조금 더 싸게 차를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솔깃한 제안. 드디어 며칠 뒤, 일면식도 없던 박 씨와 김 씨가 이 정체 모를 50대 남자를 매개로 서로 만났습니다.

대면 거래일을 앞두고 이 남자는 두 명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별고(別故)'를 전합니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 자신이 직접 거래하는 장소에 나가지 못하게 됐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차주인 박 씨에게는 단단히 으름장을 놓습니다. 자기가 잘 아는 딜러를 보낼 테니, '친한 동생'이라고 말하면 값을 제대로 톡톡히 쳐줄 수 있단 겁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당부 사항을 덧붙입니다. 먼저 차를 살 때 세금을 조금 덜 낼 수 있도록 원래 팔기로 한 돈보다 300만 원 적은 금액으로 이른바 '다운계약서'를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계약서는 명목일 뿐이고, 실제로는 원래 말했던 제값을 다 받을 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안심도 두둑하게 챙겼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이렇게 값을 쳐주는 건 쉽지 않으니 괜히 섣부르게 "돈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남자는 딜러 김 씨에게는 '친한 동생'을 보내겠으니, 대금을 자기 계좌로 보내라고 전했습니다.

자, 드디어 김 씨와 박 씨가 만났습니다. 같은 차를 두고 한 사람은 2천6백만 원을 받을 생각을, 한 사람은 2천3백만 원을 줄 생각을 합니다. 이미 단단히 50대 남자를 신뢰하고 있던 차주 박 씨는 기꺼이 본인이 생각했던 금액보다 300만 원 더 적은 금액으로 '다운계약서'를 씁니다.

이런 전말을 전혀 알지 못했던 딜러 김 씨는 '정상 계약서'를 쓰고 대금을 어떻게 치를지 물어봅니다. 박 씨는 이미 50대 남자가 말한 대로 '친한 동생'이라며 자신을 소개하고, '형'에게 먼저 돈을 보내면 수수료를 제외한 나머지를 자신이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설명합니다.

오랜 시간 딜러로 일해 온 김 씨가 어색한 기색을 눈치채고 어떤 관계냐 재차 물었지만 그때마다 박 씨는 '친한 형'이라고 말합니다. 이윽고 김 씨가 박 씨가 보는 앞에서 돈 2천3백만 원을 50대 남자에게 보냅니다. 그 뒤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결말입니다.

50대 남자는 김 씨에게 알려준 대포 계좌에 돈이 입금되자마자 은행 창구와 인출기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당들을 시켜 20여 분 안에 모두 돈을 인출해 달아납니다. 대낮의 미스터리는 모두 52살 남자 최 모 씨가 단 전화 몇 통으로 연출한 작품이었습니다.
경찰은 8개월간의 추적 끝에 최 씨 일당을 검거해 3명을 구속하고 1명을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최 씨는 두 사람을 살뜰하게 꼭두각시 놀음 시킨 것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숙자들을 상대로 식대를 제공하면서 얻은 개인정보로 대포통장을 만들어 범행에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함께 검거된 일당 중에서도 그렇게 환심을 사 끌어들인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수 천만 원을 떼인 딜러 김 씨는 민사소송을 진행해 박 씨로부터 차를 받았습니다. 박 씨는 차량 대금이 변제되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성인 두 사람이, 그것도 수 천만 원의 돈을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떼어 먹혔다는 사실이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직접 만나기까지 했으니, 거래 전 몇 마디만 서로 나누었더라도 금방 실체가 드러날 수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입단속을 받은 차주 박 씨도, 딜러 김 씨도 서로 최 씨에게서 약속받은 금액에 대해 한 번도 명확하게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기 피의자 최 씨는 2천3백만 원과 2천6백만 원 사이에 있는 중고 SUV의 실제 가격보다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보려는 '거래 상대방들'의 합리적인 마음을 훌륭하게 이용한 셈입니다.

혹여나 이 마음에는 조금이나마 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어쩌면 놓칠 수도 있다는 아슬아슬함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래서 눈앞에 있는 상대보다 얼굴도 모르지만 "이익을 보게 해주겠다"는 사람을 더 믿게 된 걸 지도요. 적어도 어쩌면 이 대낮의 황당한 사기 사건이 주는 교훈은 '인간을 불신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편을 의심하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전화 몇 통에 맞은 뒤통수…중고차 '삼각 사기'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