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벨기에 브뤼셀에선 쉽게 보기 힘든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가난한 빚쟁이'는 돈 갚은 날짜를 한참 어겨놓고도 배짱 좋게 활짝 웃고, '잘 사는 채권자들'은 이렇게 어이없이 당당한 빚쟁이의 모습에 무척이나 화가 나 분을 못 이기는 광경이 전 세계에 보도된 겁니다. '가난한 빚쟁이'인 그리스 치프라스 총리는 어제 유로존 정상회의에 마치 개선장군처럼 등장했습니다.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으로 '긴축안 반대'라는 국민의 뜻을 등에 업은 치프라스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얼굴이었습니다.
● '협상의 달인'이라는 새 재무장관…정말 '신의 한수'가 될까?
새롭게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바로파키스를 대동했는데, 이 사람의 발탁은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얻고 있습니다. 옥스퍼드대 경제학 박사이자 아테네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바로파키스는 6월까지 채권단과 구제금융 협상을 진두지휘한 인물입니다. 돌출행동과 파격 발언으로 채권단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던 전 재무장관과 달리 영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영국인보다 더 격조 있는 정통 영국 영어를 쓰는 바로파키스는 매우 온화한 스타일이지만 결국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협상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투표 전까진 무조건 채무 탕감을 요구하는 '불도저형' 재무장관을 기용했다가, 이제 채권단과 본격적인 밀당을 통해 최대한 받아내야 할 시점에선 '전략가형' 재무장관으로 재빨리 바꾼 치프라스의 선택을 보면 그의 정치적 감각을 함부로 폄하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 '빈손'으로 와선 큰소리 친 치프라스…'독설'로 응수한 유로존 정상들
그래도 뭐라도 들고 올 줄 알았던 치프라스가 새로운 안은 커녕 빈손으로 와서는 일단 석 달 정도 급한 돈을 지원해달라는 소리에 유로존 정상들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했습니다. 벨기에 총리는 "협상 테이블에 오면서 아무것도 안 가져오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치프라스는 유로존에 남겠다는 그리스 국민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고, 네델란드 총리는 "나는 이번 정상회의가 매우 불쾌하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을지는 그리스에 달려 있다. 협상안을 가져오지 않으면 우리는 도와줄 수 없고 모든 것은 그리스 정부의 책임"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유로존의 맹주인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다른 정상들 수준의 '막말'은 자제했지만, 며칠 안에 구제안을 내놓지 않으면 결국 방법이 없다는 식으로 그리스를 압박했습니다. 분통 터진 유로존 정상들 사이에서 가장 그리스편은 그나마 프랑스입니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기를 원한다"면서 "그리스가 책임 있는 협상안을 내놓으면 유럽도 연대를 보이겠다"며 그리스를 살살 어르고 있습니다.
일단 현재까지 상황으로만 판단하면, 치프라스는 아주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보여준 셈입니다. 정권의 명운을 걸고 국민투표를 밀어붙였고, "채권안에 반대해야 앞으로 협상에 유리하다. 그리스를 살려달라"는 애국심에 호소한 여론전으로 투표 결과도 자신의 바람대로 얻어냈습니다. 거기에 본격 협상에 앞서 채권단과 싸울 대표선수인 재무장관도 교체해 만반의 준비도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본 게임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는 자신들의 어마어마한 부채에 대해 얼마나 책임있는 모습을 보일까요? 그리고 유로존들은 디폴트 상황에 처한 그리스에 얼마나 '연합체'답게 연대하는 모습을 보일까요? 유로존이 새로운 대책안을 가져오라고 명시한 최후 통첩일은 9일, 그리스가 내놓을 답과 그에 답할 유로존의 입장이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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