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와 영화, 픽션과 픽션, 흑백과 컬러, 롱테이크와 클로즈업을 넘나드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형식의 변주보다 놀라운, 드라마가 선사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것들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우연성과 촬영 과정에서 일어난 즉흥성에서 비롯됐다. 그 마법은 감독이나 배우들이 의도하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2부가 시나리오도 없이 완성되다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힌 키스신이 즉흥적으로 이뤄졌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선사한 마법같은 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한다.
Q.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무엇이었나?
A. 프리 프로덕션보다 포스트 프로덕션이 훨씬 힘들었다. 특히 편집 과정. 왜냐하면, 우리는 즉흥적으로 찍은 장면이 많아서 매 컷 대사가 달랐다. 내가 일본어를 못 알아 듣기 때문에 새로운 장면을 꺼내면 늘 번역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편집은 한 프레임, 즉 24분의 1초의 싸움인데 그게 가장 힘들다. 어제 밤을 새 마친 작업도 오늘 보면 이상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과연 이 영화가 완성이 될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Q. 편집한 장면 중에 아쉬운 장면이 있다면?
A. 날린 장면이 있긴 하지만 결국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편집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고유한 리듬을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 편집은 음악을 만드는 과정처럼 리듬의 페이스와 흐름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래 걸렸다. 글 작업으로 치면 난 퇴고를 오래 하는 작가다.
Q. 고조시 사람들과의 인터뷰에서 미정이 태훈에게 통역을 해줄 때 자막을 쓰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A. 자막을 쓰지 않았을뿐더러 미정은 모든 말을 통역하지도 않는다. 태훈의 입장에선 말을 못 알아들으니 상대방의 말을 그저 사운드다. 태훈처럼 통역을 기다리고, 빠뜨리면 빠뜨리는 데로 수용하고, 관객 역시 태훈의 시선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것 중요한 선택이자 연출 중 하나였다.
Q. 키스 장면의 경우 넣을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A. 그렇다. 하지만 그 장면은 작별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 장면을 찍을 때 비가 오락가락해서 찍네 마네 했다. 촬영 감독이 "지금 찍자. 아님 못 찍을 거 같다"고 하더라. 그 장면에서 두 인물의 감정을 들여다보니 혜정 입장에서는 유스케를 거절을 하긴 하지만 연락처를 적어주는 것으로 여지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 유스케의 입장에서는 입을 맞추고 싶을 것 같았다.
Q. 유스케의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신이었다. 자신을 거절한 여자에게 키스할 배포라니.
A. 생각해보면 유스케는 처음부터 용기를 냈다. 혜정에게 말을 건네고, 감을 줬다. 또 남친이 있다고 하는데도 일본의 남자친구라도 되겠다고 하고, 자신을 거절한 여자에게 불꽃놀이를 가자고 하고, 한국 가면 안내해달라고 하기도 하면서 끝까지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게 치근덕대는 느낌은 아니길 바랐다. 다행히 유스케가 그걸 적정한 선에서 표현해줬다. 혜정의 입장에선 처음엔 방해된다고 생각했지만 이 사람을 통해 얻게 된 평화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돌아가야 한다는 걸 잊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Q. 결과적으로 요네자와 코하루 할머니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됐다. 영화 시작 전 애도의 메시지를 띄웠는데?
A. 편집하는 과정에서 부고 소식을 들었다. 아흔 가까이 되셨는데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할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자막으로나마 애도의 마음을 표하고 싶었다. 이 작품을 지난해 9월 나라영화제 개막작으로 틀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그때 어떤 여자분이 일어나더니 "고맙다"고 하시더라. 그분의 따님이었다. 오히려 내가 감사했다.
Q. 혜정은 "몇 살까지 살고 싶냐"는 유스케의 질문에 "오래 사는 것보다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당신의 가치관일 것 같았다.
A. 내 가치관은 "꿈의 노예가 되지 말자"라는 유스케의 대사에 드러난다. 우리 사회는 목표가 없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취급하곤 한다. 그런 분위기가 싫다. 꿈이나 목표가 없어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영화감독은 뭘 만들어야 하고 어디까지 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한 직군이다. 그러면서 본질을 놓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궁극적으로 행복하기 위해 사는 건데.
Q. 그렇지만 감독님은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A. 완전히 그렇다. 이제는 작업과 생활, 자연으로서의 나와 감독으로서 나의 밸런스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속 가능한 삶과 작업의 공존이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Q. 언제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나?
A. 고등학교 때부터 씨네필이었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면서 감독을 꿈꿨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 모든 건 감독이 되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Q. 그동안의 영화를 보면 관계의 작은 변화가 주는 미동을 섬세하게 포착해왔다. 감독으로서 일관되게 추구해온 주제나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다.
A. 아직 구체적으로 정립되진 않았지만, 우리 삶과 닮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짜 같은 거 말고 진짜 우리 삶이 닮긴 영화 말이다. 그러나 보니 '회오리 바람', '잠 못 드는 밤',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나온 거다. 우리 일상의 드라마는 강한 이벤트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심심한 드라마의 연속이 아닌가. 그게 너무 현실적이어서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경계가 뚜렷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Q. 앞으로 어떤 영화를 하고 싶나?
A. 내년에 마흔이 된다. 이제 중년이 되는데 긴 호흡의 작업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 세 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제 필생의 주제라던가, 나만의 영화 찍기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당분간 쉬면서 생각을 좀 해보려고 한다.
Q. 영화에 영감을 주는 존재가 있나?
A. 아내(김우리 프로듀서)다. 내 장편 세 작품 모두를 프로듀싱 했다. 온종일 영화 이야기를 하는데 아내의 피드백을 통해 이야기를 구체화 시켜나간다. 아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정리된다. 내 모든 작품은 아내와 공동 연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번 작품은 아이가 태어나 촬영 현장에는 오지 못했지만, 매일 촬영이 끝나면 전화를 걸어 당일 현장을 리포트를 했었다. 아내의 조언과 위로를 들으면서 전화를 끊을 때마다 "알았어. 이제 그만 징징대고 잘할게"라고 말하곤 했다. 이젠 작은 우리(딸)도 생겼다.
Q. 혜정과 유스케는 재회했을까?
A. 알 수 없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에 거기까지만 찍은 거다. 관객들이 그다음을 상상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 상상이 이 영화를 완성하는 것일 수도 있다.
Q. 제작사 이름인 '모큐슈라'(MOCUSHURA)의 뜻이 궁금하다.
A.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크(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링에 오르는 매기(힐러리 스웽크)에게 가운을 입혀준다. 그 가운의 뒷면에 써있는 말이다.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면 영화를 다시 한번 봐달라. (모큐슈라는 게일어로 '나의 사랑, 나의 혈육'이라는 말이다.)
<사진 = 김현철 기자>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SBS funE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