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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메르스 확산…'현실'은 '소설'같지 않기를

[취재파일] 메르스 확산…'현실'은 '소설'같지 않기를
<1>

… 그 공무원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야 상관에게 연결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책임감 있는 의사라면 처음 이야기하게 된 하급 공무원에게 실명 전염병의 발발을 알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랬다가는 곧바로 공황이 일어날 테니까. 전화를 받은 공무원은 대꾸했다.

"의사라고 하셨죠. 내가 선생 말을 믿기를 바란다면. 그래요 물론 나는 선생 말을 믿습니다. 하지만 나도 지휘 체계에 속한 사람이고. 따라서 선생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밝히지 않는다면 윗분에게 이야기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건 비밀인데요."

"비밀이라면 전화로 이야기할 수가 없죠. 직접 이곳으로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난 집을 나갈 수가 없어요."

"아파서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네. 아파요." 눈이 먼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의사한테 전화해 보시지요. 진짜 의사한테 말입니다."

공무원은 그렇게 빈정거리더니, 자신의 재치에 기분 좋아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 中 (본문 중 따옴표는 읽기 쉽게 하기 위해 추가했습니다.)

 
<2>

"어제부터 화양맨션 주민들이 줄줄이 입원하는 중이야. 더 이상한 건 북구인데… 미래병원이 수안산업단지 부근에 있잖나. 화양맨션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데, 그쪽도 토요일 저녁부터 빨간 눈 환자들이 하나 둘 들어왔던 모양이야. 병원에선 유행성 결막염 정도로 판단했다가 하루 사이에 환자가 우르르 몰려들고 사망자가 나오면서 이 난리가 난 거고. 지금은 환자가 몇 명인지 정확히 파악도 안되는 지경이야"

- 정유정 '28' 中


소설 속 이야기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소설가 정유정 씨의 '28'. 두 작품 모두, 기존에 없던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신종 전염병이 번지고('눈 먼 자들의 도시'는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되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전염병, '28'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면서 빠른 시간 안에 사망하게 되는 병), 이 '해법 없는 미지의 공포' 앞에서 드러나는 사회의 모순과 무너지는 인간성을 그린다.
 
… 일을 시작하면서 수진은 곧바로 깨달았다. 이 임시 진료소가 하루 이상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었다. 동구와 남구뿐 아니라 서구에서까지 감염자가 속속 들어왔다. 화양 전역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는 셈이었다. 첫 환자가 발생한지 불과 엿새 만에, 이쪽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게다가 보호자의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기 때문에 환자와 관련된 모든 일을 간호사가 처리해야 한다. 얼음 주머니를 대주는 일에서부터 대소변 수발까지. 수진은 환자들 사이를 미친 사람처럼 나돌아 다니면서도 불길한 생각 하나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박남철 과장의 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국가 차원의 대책이 대체 뭘까. 국가가 명령한다고 빨간 눈이 퇴장하지는 않을 텐데…

- 정유정 '28' 中

 
메르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우리나라의 최근 사태를 보며, 이 두 소설이 떠오른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이들 소설은 현실이라기엔 가혹하지만 현실에도 있음직한 이야기와 상황을 담고 있다. 작가의 필력에 빠져들어 얼른 결말을 알고 싶은 마음에 단숨에 읽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독자들의 마음은 답답하고 무거워진다.

그런데 이번 메르스 확산 사태를 보면, 어디서 본 듯한 상황의 연속이다. 메르스 검사를 요구했던 첫 병원에 보건 당국은 아닐 경우 당신들이 책임지라는 '창조적인' 대응을 내놨고, 당국은 정보를 숨기기 급급해 지금껏 비난을 사고 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SNS를 통해 '의문'을 쏟아냈고, 나름대로 그럴싸한 가설과 시나리오를 풀어냈다. 이런 여론에 뒤이어 나온 건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닌 '유언비어 유포자 엄단'이라는 처벌이었다. '괴담'을 처벌하겠다는 재빠른 발표만큼, 재빠른 '설명'과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놨다면, 불신과 혼란은 훨씬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 한 사회에서 음모론이 유행하고 음모론이란 딱지가 횡행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처참한 결과를 가져온 사건이 발생했다 치자.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원인을 묻고 따지는 과정에서 미심쩍은 사안들이 발견되었다. 이를 당사자나 주위 사람들이 문제 삼았다. 그런데 책임 당국은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사람들이 더 큰 목소리로 묻자, 당국은 이에 답하기는커녕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단지 미심쩍을 뿐이었던 것이 확고한 의심으로 발전하는 순간이다.

비판의 목소리가 더 커지자 당국은 이렇게 답했다. '당신들, 우리를 믿으라는데 자꾸 왜 그래? 무슨 의도가 있는 거 아냐? 대체 배후가 누구야? 누가 조종하는 거야?' 만약 당국이 의혹을 풀려 노력하고 비판에 답했다면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는 대신 의심과 비판을 묵살하고 탄압하면 사달이 난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사고가 다시 발생할 수 있으며, 처리 과정의 문제를 따지지 못했기에 이전의 잘못을 재연할 소지가 커진다. 그리고 합리적 의혹과 정당한 비판을 탄압했기에 의심과 비판은 더 공고해지고 확산된다…

- 전상진 '음모론의 시대' 中

 
<4>

… 고글과 마스크 같은 방역 물품, 기본 생필품이 순식간에 동나버렸다. 카드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됐고, 화양시내의 현금 인출기는 모조리 빈 깡통이 됐다. 도로에선 차들이 폭주하고, 사람들은 라면 한 상자를 놓고 주먹다짐을 벌이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쇠 파이프로 상점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다. 동네 골목길과 도로에서는 하룻밤 새에 버림받은 개들이 떼를 지어 나돌아 다녔다.

연일 기록을 갱신하는 한파에 환자들은 제대로 난방도 되지 않는 실내 체육관에 수용되고 있었다. 말이 좋아 '통합거점병원'이지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고 환자를 주르르 늘어놓는 수용소 수준에 불과했다. 의료진도, 의료 물품도 부족한데 환자는 쓰나미처럼 덮치고, 대증요법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처치도 없는 형편이었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은 시청으로 몰려들었으나 무장 군인에 막혀 안으로 밀고 들어가지 못했다….

- 정유정 '28' 中

 
소설은 이렇게 아노미 상태로 치닫는다. 물론 현실은 이 지경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첫 대응이 불러온 피해는 작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공연' 분야에선, 취소되고 미뤄지는 행사가 생겼고, 이미 예매한 관객들은 환불을 하기도 한다. 격리돼 있는 수많은 의심환자들은 생업에 타격을 입고 있을 것이고, 확진 환자가 거쳐간 병원은 환자들의 발길이 끊겼다. 관광업계의 타격은 말 할 필요도 없을 테다. 

매일 늘어나는 감염자 수와, 또 매일 새롭게 드러나는 방역의 '구멍'을 보면서, 소설 속 구절들이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바라게 된다. 현실은 소설과 다르기를. 전염병이야 없어질 수 없겠지만, 소설 속 상황처럼 '답답한' 대응만은 없기를.


** 이 내용은 SBS 뉴스 팟캐스트 '골라듣는 뉴스룸' 중 문화부 코너인 '목동살롱'에서도 방송됐습니다. 여기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골룸] 목동살롱06 : 메르스·눈먼 자들의 도시·28·연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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