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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세기의 대결, 시대의 마감

[취재파일] 세기의 대결, 시대의 마감
공이 울렸다. 메이웨더가 한 손을 번쩍 들었다. 한 박자 늦게, 파퀴아오도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 한 박자가 문제였다. 찰나의 주저에서 대중은 승패를 읽었다. 아마 본인들도 직감했으리라. 승자와 패자가 갈리자, 환호와 야유가 교차했다. 팬들은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TV채널도 돌아갔다. 국내에서는 막대한 광고비를 들인 음료브랜드가 최후의 승리자라는 말이 나왔다. 세계가 기다린 ‘세기의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

어찌 보면 예견된 승부였다. 두 선수 모두 전성기를 지났다. 메이웨더는 불혹을 앞뒀고, 파퀴아오는 38살에 접어들었다. 메이웨더는 최근 3년 동안, 파퀴아오는 5년 동안 KO승이 한 번도 없었다. 복서로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냉정한 도박사들은 ‘메이웨더  판정승’에 가장 많은 돈을 걸었고, 예상은 정확했다. 6년을 끌어온 대결이었다. 사실 하려면 그때 붙었어야 했다.
메이웨더 파퀴아오
한편으로 그들은 각자의 경기를 충실하게 했다. 메이웨더는 잘 피해 다녔고 잘 막았다. 전매특허인 세계 최고 수준의 숄더롤과 방어 기술은 명불허전이었다. 스피드는 전성기 못지 않았다. 435번의 펀치를 날려 148번을 맞췄다. 유효타는 파퀴아오의 2배에 달했다. 욕은 먹을지언정, 펄펄 날아다니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실리 위주의 복싱을 했다.

파퀴아오도 모자라지 않았다. 졌지만 박수를 받을 만했다. 빗나가고 막혔을지언정, 여전히 매서운 펀치와 스피드를 보여줬다. 메이웨더에 비해 줄곧 공격적이었던 점도 그랬다. 메이웨더의 카운터에 잘 대비했고, 결정타를 허용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 과히 녹슬지 않은 실력이었다. ‘기대감’을 내려놓고 보자면 기술적으로는 정상급 경기였다.
메이웨더 파퀴아오
그러나 그냥 그러고 말기에는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름값이 너무 컸다. 그동안 수많은 기록과 이야기, 또 상징과 의미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지층을 이뤘다. 적어도 수천만 명이 기다린 시합이었다. 기대감이라는 건 그냥 “자, 내려놓자” 한다고 내려지는 게 아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정녕 모두가 바란 것은 승패를 떠나 피와 살이 튀는, ‘박터지는’ 경기였다. 파퀴아오가 불꽃같은 연타를 쏟아 붓고 메이웨더가 물러서지 않는, 폭풍 같은 난타전에 서로 몇 번씩 다운됐다가도 다시 일어나 주먹을 맞부딪히는. 파퀴아오의 돌주먹에 ‘프리티 보이’ 메이웨더의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져 내리는, 상상만 해도 피가 끓는 그런 경기 말이다. 사실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름값에는 그 정도 했어야 맞다. 3억 원짜리 암표를 사서 MGM그랜드 아레나의 링 사이드에 앉은 사람이나 치맥을 끼고 TV 앞에 앉은 사람이나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경기는 끝났다. 지금으로서는 재대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경기 후 메이웨더는 자신이 가진 5개 세계 타이틀을 모두 반납하고 오는 9월 마지막 경기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아무런 타이틀 없이 홀가분하게 은퇴전을 치르겠다는 의미다. 이제 다른 선수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도 했다. 정상에서 내려올 채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설상가상 파퀴아오는 이번주 안에 어깨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재활에는 최소 9달에서 1년 정도가 걸린다. 이쯤 되면 물 건너간 것 같다. 만에 하나 리매치가 성사된다고 해도 큰 의미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한 번 김빠진 이벤트로 이만큼의 화제를 모을 수는 없다.
메이웨더 파퀴아오
시대의 마감이다. 스포츠와 복싱의 역사에서 하나의 시대가 막을 내린 셈이다. 이제 다시는 그 정도의 대결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다 해도 그만큼의 커리어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십 수 년이 걸릴 것이다. 이번 대결에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고, 또 아쉬움을 넘어 분노하기까지 한 건 그 때문이다. 우리 시대 마지막 ‘세기의 대결’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직감했다.

“예전에 말이야, 이런 경기가 있었는데, 그때 참 대단했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렇게 두고두고 회자할 만한 경기였다. 슈거 레이 레너드와 마빈 헤글러,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경기처럼 수십 년을 넘어 뇌리에 아로새기는 그런 대결 말이다. 그래서 더욱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딱 경기가 시작하는 순간까지, ‘누가 이길까’, ‘어떻게 이길까’로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웠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 시대 또 다른 ‘세기의 대결’을 다시 한 번 기다려 볼 뿐이다. 두고두고 진한 아쉬움을 간직한 채 말이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잔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한 시대의 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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