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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근로자라고요? 저는 언론 노동자입니다.

[취재파일] 근로자라고요? 저는 언론 노동자입니다.
 지난 5월 1일을 두고 혹자는 노동자의 날이라고 하고 혹자는 근로자의 날이라고 합니다. 노동과 근로, 노동자와 근로자는 비슷한 듯 하지만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꽤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노동 勞動
1.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2. 몸을 움직여 일을 함

근로 勤勞
1. 부지런히 일함

노동자 勞動者
1.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2. 법 형식상으로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계약을 맺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을 일절 가지는 일 없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다.

근로자 勤勞者
1.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


 노동은 뚜렷한 목적을 위해 일을 하는 행위이고, 노동자는 목적 즉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반면 근로는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하고, 근로자는 근로 즉 열심히 일해서 생긴 소득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근로자가 노동자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농민과 어민, 영세 자영업자, 교수, 중소기업 직장인, 개업의, 대학병원 소속 의사는 모두 근로자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노동자는 아닙니다. 농민과 어민, 영세 자영업자와 개업의는 근로 즉 일해서 돈을 벌긴 하지만, 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 즉 '임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노동자가 아닙니다. 반면 교수와 중소기업 직장인, 대학병원 소속 의사는 노동자로 분류됩니다. 노동을 제공하는 상대방 즉 사용자나 고용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른 해석입니다.

 언어에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뜻이 담겨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단어의 사회 문화적 맥락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원을 추정해보는 차원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봤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근로자>는 23번 등장합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근로자는 勤勞하는 者 즉 단순히 부지런히 일하거나 근면한 사람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반면 <노동자>라는 표현은 단 한 건도 검색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이 직업을 선택해서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하는 이른바 노동자는 근대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국가 기구의 공식 기록에서는 노동과 근로, 노동자와 근로자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등장할까요? 국회회의록을 뒤져봤습니다.

 국회회의록에 <노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2년 11월 25일 제2대 국회 제14회 제29차 국회 본회의입니다. 안건은 “노동관계법안 상정에 관한 긴급동의안”입니다. <근로>의 첫 등장은 노동보다 다소 앞섭니다. 근로의 첫 등장은 1951년 11월 9일 제2대 국회 제11회 제91차 국회 본회의였고, 안건은 “전시근로동원법안과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 중 개정법률안 제1독회”로 돼 있습니다.

 뉘앙스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조선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던 <근로>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근로정신대>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강제 노역 등을 미화하고 가리는 일본식 표현으로 변질합니다. 국회회의록에서 근로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안건의 제목 “전시근로동원법안”을 보더라도 강제 노역까지는 아니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기 어려울 때 유독 ‘근로’라는 단어가 선호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자와 근로자는 어떨까요?
<노동자>는 1955년 6월 30일 제3대 국회 제20회 제71차 국회 본회의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회의 안건은 “조운산하노동자 처우 개선에 관한 건” 입니다. 처우 개선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근로자는 언제일까요? 바로 군사 쿠데타 이후인 1961년 7월 31일 제5.5대 국회 제66회 제25차 국가재건최고회의 회의록에 처음 기록돼 있습니다. 안건은 3.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 개정안, 4. 근로자의 단체 활동에 관한 임시조치 법안입니다.

 1961년 국회회의록에 근로자란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기 이전인 195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강점기부터 5월 1일에 치러졌던 노동절 기념식을 한국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름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날짜는 바뀌었지만, 노동절은 그대로 ‘노동절’이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시죠.

"10일 제1회 <노동절>을 맞아 오전 열시 반 부터 대한노총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노동자의 명절을 경축하는 기념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식에는 노동본부와 각산하남녀맹원 2만 여명이 참석하였으며 조 대법원장, 조 외무, 손 보사, 최 교통 각 장관 등 귀빈도 다수 참석하였으며...(중략)... 별항과 같은 이 대통령의 치사(조 외무 대독)가 있었다.”  
 [1959년 3월 10일 동아일보 3면]


 하지만 국회 회의록에서 <근로자>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결국 1963년에 노동절 즉 노동자의 날의 이름을 근로자의 날로 바꾸었습니다. 이런 흐름은 당시 신문기사에서 사용된 각 단어의 사용 빈도에서도 확인됩니다.

1920년 1월 1일 - 1945년 8월 14일
노동자 105,807건
근로자 99건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 1961년 5월 15일 (군사 쿠데타 직전)
노동자 17,936 건
근로자 540건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 직후) -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분신)
노동자 9,305
근로자 7,394

1970년 11월 14일 - 1987년 6월 9일
노동자 9,055
근로자 23,139

1987년 6월 10일 (6.10항쟁) 이후  - 1999년 12월 31일까지
노동자 33,003
근로자 45,443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 동아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매일경제 합산]


 무엇보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전까지는 노동자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광복 이후부터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기 직전까지도 노동자란 표현이 훨씬 더 많이 쓰입니다. 단 근로자의 활용 빈도가 일제강점기에 비해 다소 많아지는데, 이는 앞서 1951년 국회 회의록 안건 제목 등으로 미뤄 볼 때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국가 차원에서 ‘근로’가 많이 필요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부터 근로자 표현이 부쩍 늘어나는 게 보이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개선에 대한 인식과 요구가 커지면서 도리어 근로자란 표현이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이른바 87년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는 다시 노동자라는 표현이 다소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의 검색 기한 한도가 1999년 12월 31일까지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노동자란 표현은 훨씬 오래전부터, 흔하게 사용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시대적 분위기 또는 당대의 필요에 따라 노동자와 근로자의 단어 사용 빈도가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거칠게나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시절일 수록 근로자란 표현의 사용이 빈발했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제 ‘느낌적 느낌’에 불과한 걸까요.

 흥미로운 점은 근로자건 노동자건 소관 부처의 이름은 건국 이래 줄곧 ‘노동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때에 따라 현재 ‘고용노동부’처럼 다른 수식어가 붙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노동부가 근로부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3월 10일이었던 노동절을 다시 5월 1일로 복원하는데, 당시 이름을 노동절로 되돌릴 것이냐 그대로 근로자의 날로 쓸 것이냐를 두고 국회에서 공방이 벌어집니다. 이때 벌어졌던 에피소드가 재미있습니다. 근로자의 날을 원래대로 노동절 또는 노동자의 날로 복원하는 데에는 반대했던 주무부처 장관이 한사코 자신은 ‘노동부’ 장관이 맞다고 강조했던 겁니다.

“ '근로자의 날' 명칭을 놓고 공방을 벌인 25일 국회 노동위에서 '노동절'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던 홍사덕 의원(민주)이 남재희 노동부장관을 '근로부 장관'이라고 부르자 남재희 장관이 웃으며 자신은 노동부 장관이 맞다고 응수하고 있다”
 [1994년 2월 26일 한겨례 5면]


 매년 5월 1일 즈음에는 그날 쉬는지 안 쉬는지를 보면 내가 근로자인지 노동자인지 알 수 있다는 '웃픈' 유머가 돌곤 합니다. 근로자의 날이니 그날 쉬면 근로자이고 못 쉬면 노동자라는 거죠. (그런 면에서 기자들은 노동자가 확실합니다. 저도 언론 노동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더 열악한 조건에서 더 힘들게 ‘근로’하고 있는 노동자의 34%는 쉬지 못하고, 그 가운데 약 70%는 휴일 수당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올해 (법적인 용어로) ‘근로자의 날’에도 어김없이 반복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꾸고 개선하려면 사회적으로 우선 풀어야 할 많은 숙제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노동자와 노동절의 날에 제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그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난 2012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발의한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변경하자는 내용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여태껏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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