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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달러 안 받는 이집트 은행, 묘수인가 악수인가?

[월드리포트] 달러 안 받는 이집트 은행, 묘수인가 악수인가?
지난 2월 4일 이집트 중앙은행이 특단의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개인과 법인이 하루 1만 달러, 한 달 5만 달러를 계좌에 예치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은행이 달러를 안 받겠다는 겁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달러는 그대로 놔뒀지만 자국에서 달러가 해외로 나갈 길을 막겠다는 거죠. ‘은행이 돈을 안 받는 게 말이 안 돼 보이지만 이집트에선 눈 앞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달러 예치 제한 조치’의 배경은 두 가집니다. 달러 암시장의 씨를 말려서 ‘숨어있던 달러’를 제도권으로 끄집어 내겠다는 것과 이를 통해 바닥난 외환보유고를 끌어올리려는 심산입니다.

● 달러 없는 은행, 달러 넘치는 암시장

이집트는 2011년 시민혁명 이후 3년 넘게 이어진 사회.정치 불안으로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외환보유고는 무바라크 시절 300억 달러의 절반인 150억 달러로 뚝 떨어졌습니다. 달러가 없는 나라의 국가신용도가 좋을 리 없겠죠. 국가신용도가 떨어지면 투자도 위축될 겁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외환보유고의 대부분도 금괴가 차지하고 실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다고 합니다. ‘간당간당’하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이집트 경제가 너무 엉망이라고 나라에 달러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집트 안에 달러는 넘칠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 달러가 암시장을 통해 흘러 다니고 있습니다. 암시장에 맴도는 달러는 350억 달러로 추정됩니다. 조세를 피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고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이 한때 10%까지 벌어지면서 생긴 문제 일수도 있습니다. 달러를 현지화로 바꿀 때 암시장이 더 주니, 달러가 암시장에 쏠리게 되는 겁니다.
[월드리포트] 정규
● "달러 보내려고? 줄을 서시오~"

달러 예치 제한 조치는 당장 수출입 시장에 혼란을 몰고 왔습니다. 그 동안은 은행에 달러가 없다 보니 해외에서 물건을 들여온 기업은 암 시장에서 현지화를 달러로 바꿔 물건값을 지불해왔습니다. 대금 결제는 주로 계좌 송금으로 이뤄지죠. 하지만, 이제는 내가 바꿔온 달러를 은행이 안 받아줍니다. (수십만에서 수천만 달러가 왔다 갔다 하는 무역거래 경웁니다.) 오직 은행에서만 현지화를 달러로 바꿀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은행에는 달러가 없습니다. 결국 수입업자는 물건값을 현지화로 은행에 일단 넣어놓고 달러로 바꿔 수출업자에 송금되길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출업자도 마찬가지죠. 내가 이집트에 물건을 팔아서 설사 그 돈을 달러로 받았더라도 은행에서 받아주지 않으니 돈을 해외 본사로 보낼 재간이 없는 거죠. 한 두 푼도 아니고 수십만에서 수천만 달러를 내 손으로 들고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죠. 은행에서 달러 환전과 송금까지 이뤄지는 기간은 거래 물건의 중요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생필품과 의약품, 군수물자가 최우선인데 먹고 사는 데 꼭 필요하지 않은 일반 소비재는 후순위로 밀려서 환전과 송금 완료까지 길게는 두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 속타는 한국 기업, 발만 동동

두 달 넘게 대금 송금 문제가 쌓이면서 이집트에서 활동하는 해외 기업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업마다 거래 방식과 입장 차이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힘들다’라는 데 큰 이견이 없습니다.

물건을 못 파는 건 아니지만 팔아도 돈이 늦게 오면서 그야말로 지불 지연이 생깁니다. 당장 이집트 지사의 실적에 영향을 주게 된다고 합니다. 단발성 거래가 아닌 꾸준하게 관계를 이어온 거래처를 가진 곳은 더 심각합니다. 물건을 팔면 돈을 받아야 또 새 물건을 내어 줄 텐데 물건과 돈을 주고 받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매출에 영향을 받는 거죠. 예를 들어 한 달에 5개씩 거래했지만 대금 지연이 발생하면서 3개 밖에 못 파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겁니다.

한 기업체는 계약을 맺은 뒤 대금 일부가 계좌에 들어와야 본사에서 물건을 배에 실어주는 데 송금이 늦어지면서 선적도 늦어지고 그러는 사이에 가격 변동이 생기면서 계약이 틀어지는 일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국 기업은 물건을 팔고서 받지 못한 대금이 한 때 2천만 달러까지 쌓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재원이 직접 여기저기 돈을 받기 위해 출장을 다니는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건은 나갔는데 그만큼 돈이 들어오지 않으니 본사도 답답하겠죠. 한국 본사에서 전해지는 무언의 압박도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면서 이곳 카이로 주재원들의 스트레스 수치는 여름으로 향하면서 달아오르는 사막의 열기처럼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습니다.

심한 곳은 지난해 대비 매출이 30%까지 줄었다고 하소연합니다. 기업마다 영업기밀이니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한국 기업이 제때 받지 못하거나 제때 보내지 못하는 돈이 수억 달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월드리포트] 정규
● 이집트에게는 보약일까? 수입업체 울상

이집트는 시장 상품의 80%를 수입하는 나라입니다. 가뜩이나 수입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물건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니 시장이 잘 돌아가지 않겠죠. 당장 물건이 부족합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면 물건값은 오르겠죠. 이게 만약 원료라면 어떨까요? 공급이 부족하면 공장의 생산량은 감소할 것이고 물건을 만들어 팔지 못하는 공장은 경영난을 겪게 될 것이고 경영난은 당장 노동자의 임금에 영향을 주고 이것은 소비위축으로 이어지고.. 경제 성장률은 떨어지고 경제난이 더 가중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겠죠. (이해를 돕기 위해 절차를 좀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직 시행한 지 두 달 정도라서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이집트의 수출입협회에서는 지금 같은 현상이 장기화 될 경우 수입품 가격이 40 ~ 500% 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집트 당국은 식료품이나 의약품 같은 생필품에는 환전 우선 순위를 둬 생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하고 있다고 하지만 제 경험으로는 그렇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건선질환 연고를 사러 약국에 갔더니 늘 진열장에 있던 연고가 없다고 하더군요. 뭐 여기만 그런가 보지 하고 다른 약국을 갔는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대형 약국까지 열 군데를 다 가봤지만 제가 찾는 연고는 품절이더군요. 도매상까지 확인해 보니 이미 한 달 전부터 수입이 끊긴 상태였습니다.

제 짐작에는 달러 예치 제한 조치와 관련 있다고 봅니다. 이집트 현지 신문을 살펴보니 수입이 제 때 이뤄지지 않으면서 700개 의약품목이 이집트 의료시장에선 바닥이 났다고 합니다. 달러 예치와 송금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의약품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니 순위에서 한참 뒤에 밀려있는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관련 제품을 다루는 기업은 얼마나 속이 타겠습니까?
[월드리포트] 정규
● 이집트의 뚝심은 어디까지?

달러 예치 제한 조치를 두고 “근시안적인 행정이다.” “아니다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이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장기적 효과를 주장하는 쪽은 당장이야 수입과 물가에 악영향을 미치겠지만 장기적으로 암시장에 떠돌던 달러가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져 언젠가는 제도권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집트의 국가 신용도도 높아져 해외 투자가 늘 것이고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이집트 중앙은행도 달러 예치 제한 조치 이후 초반엔 일주일에 3번 달러를 시중 은행에 풀었지만 요즘은 일주일에 5번으로 늘리고 있는 것도 숨어있던 달러가 유입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죠.

이집트 중앙은행은 또한 며칠 전 사우디 같은 걸프 국가로부터 60억달러를 유치했습니다. 외환보유고도가 210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고 자랑합니다. 긍정적인 전망을 갖는 이들은 이렇게 외환이 늘면서 지금의 대금지연과 달러 송금 문제도 차츰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일부에선 오는 6월 중순에 시작되는 라마단을 전후해 달러 예치 제한 조치에도 변화가 생길 것으로 내다보기도 합니다. 라마단은 한 달간 해가 뜨는 시간에는 금식을 하는 기간입니다.

금식이라지만 해가 지면 성대한 만찬을 즐기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위해 음식을 제공합니다. 또 라마단이 끝나면 사나흘간 축제처럼 온 가족이 모여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라마단 기간 소비지수는 평소의 2~3배로 뛰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단연히 이 기간 많은 돈이 풀리겠죠. 암시장을 맴돌다 갈 곳 잃은 달러로 어느 정도 함께 풀릴 것이란 의견이 있습니다. 또는 라마단이 성스러운 기간이기에 여기에 맞춰 이집트 정부가 수출입 기업에 달러 예치와 송금 제한을 완화해주는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란 전망도 있습니다.

결국 달러 예치 제한 조치의 성패는 이집트 경제의 뚝심에 달려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물가상승. 생산 감소, 해외 투자 위축 같은 수입난에서 파급되는 문제를 얼마나 버틸 힘이 있느냐입니다. 워낙 취약한 산업기반을 가진 이집트에겐 지금 밀려드는 파도가 버거워 보이긴 합니다. 일부는 장기적 안목에서 순기능이 언제가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내다봅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지금의 조치는 결코 장기적 대안이 될 수 없는 ‘극약 처방’에 가까워 보입니다. 몇 개월이면 몰라도 해를 넘기며 끌어가기엔 이집트에 미치는 경제적 피해가 심각합니다. 이집트에 물건 판 해외 기업이야 돈을 좀 늦게 받을 뿐일 수도 있지만, 수입한 원료과 제품을 토대로 경제를 굴려가는 이집트가 느끼는 부담은 차원이 다를 겁니다. 빈약한 이집트 경제구조가 암시장과 제도권의 기싸움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형국입니다. 건너편 절벽엔 도약의 기대가 있지만 절벽 아래 이집트 경제를 받쳐줄 그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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