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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취재파일] 세월호 1년 -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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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16일)은 세월호 참사 발생 1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참사 1주기를 맞아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SBS 기자들과 앵커가 마주 앉아 참사 당시 상황과 그 후 1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언론에 쏟아진 비판에 대해서도 솔직한 생각을 털어놨습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제작된 특집 오디오 취재파일 '세월호 1년 -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 업로드합니다.




[심영구/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 취재 담당]
어머니들 위주로 죽 수십 명이 모여가지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앉아가지고 제발 살려달라고 제발 구해달라고 통곡을 하면서 애원하듯이 기도를 하는데, 같이 있던, 다른 남자 기자들이나 해서 다 같이 그냥 저희도 그냥 꺼이 꺼이 울었거든요. 너무 참혹한 광경이고. 그때 순간이 사실 저는….
 
[류란/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목포해경 취재 담당]
거기에 대한 치료비를 당신이 장애를 입거나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원은 있지만 지급할 근거가 없습니다 라고 안 주고 있는 거예요.

[조을선/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희생자 가족 취재 담당]
가서 들었던 생각은 내가 여기 왜 왔는가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분명 기자로서 다하지 못한 소명이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죄를 했죠. 죄송합니다. 
세월호_640
[김성준 / 진행자]
안녕하십니까 특집 오디오 취재파일 김성준입니다. 4월 16일 무슨 날인지 아시죠? 세상이 벚꽃빛깔로 가득한 이 봄날에 남해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가라 앉았습니다. 295명이 숨지고 9명이 실종된 그 날, 4월 16일 입니다. 벌써 1년이 흘렀습니다. 국가가 우리 시스템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국민을 구하지 못한 사건, 아직도 생생하고 아직도 아픕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서 오늘은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일 년 전 그 날을 회고하고 그 동안 뭐가 달라졌는지 또 뭐가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는 SBS 정책사회부 심영구 기자, 시민사회부 류란 기자, 정치부 조을선 기자, 영상취재부 양두원 기자가 나와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보니까 심영구 기자, 류란 기자, 조을선 기자, 1년 전 이 날에 나란히 시민사회부 사건팀에 있었잖아요. 심영구 기자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바이스 캡이라고 쉽게 말하면 부팀장을 했었고…어쨌든 각자 지금 자리에서 세월호 1년 어떻게 돌아봤는지 이야기해주기 바랍니다. 양두원 기자도 영상취재 기자로 현장을 취재했었잖아요?
 
[양두원 / SBS 영상취재기자]
네, 한 3주 정도 가있었죠
 
[김성준]
3주? 취재기자도 마찬가지지만 카메라기자로 이런 사건 취재한다는 게 사실 작지 않는 경험일텐데, 역시 자세히 다시 한 번 회고를 해주기 바랍니다.
 
자 한번 들어가볼까요? 먼저 심영구 기자. 우선 이렇게 시작을 해보죠. 그날 그 순간, 2014년 4월 16일 아침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사건의 발단부터 다시 정리해볼까요?
 
그래픽_해양경찰 세
●2014년 4월 16일,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나?

[심영구 / 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 취재 담당]
사실 저는 4월 16일 생각을 하면은 세월호 참사 생각을 하면, 그 당일날 아침에서 진도 현장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요. 그 다음부터는, 사실 잠도 잘 못 잤고 하루가 딱 단절이 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거든요. 4월 16일은 오히려 기억이 잘 나는 편인데, 아침까지는요. 전날 좀 술을 많이 마시고 아침에 좀 경찰청에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널브러져 있어가지 고 오늘 일정들 챙기고 그러고 있었는데, YTN에서 속보가 나왔죠. 한 9시 20분 좀 넘어가지고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 ' 어? 저거 뭐야.' 다들 이러고 있는데, 일단 현장이 너무 머니까 일단 뭐 상황 보자 이러고 있는데. 거기 승객 분 전화 연결을 하더라고요. 전화 연결을 해서 YTN에서 지금 상황을 물어보는데 승객 분 음성이 너무나 평온하고 너무 차분하게 연결을 하셔가지고 아 별거 아닌가 보다 그런 생각들 을 하고 있고, 회사 안에서는 보니까 속보 준비를 하고 그런 상황이었고, 저희도 좀 알아보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11시가 넘어서 다 같이 전원 구조 됐다는 오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김성준]
그렇죠. 그 얘기 류란 기자가 해볼까요? 점심 시간 직전쯤 되죠? 자막으로 전원 구조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었죠
▶ 구조 인원 '오락가락' 발표…혼란 키웠다
 
[류란 / 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목포해경 취재 담당]

저는 개인적으로 집이 회사 가까운 목동이어서 속보가 떴을 때 가장 먼저 튀어와서 회사에 앉아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4월 16일 당일의 24시간, 17일 아침 퇴근할 때까지의 24시간을 회사에서 지내는 과정을 본 어떻게 보면 목격자인데요. 점심 시간 직전에 전원 구조 소식이 타사를 포함해 저희도 방송의 방향이 됐었습니다.

그거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반성과 많은 반성이 이뤄지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이 지금 유족들도 인터뷰를 해보면 가장 서운하고 언론이 가장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부분인데요. 그 당시에 언론이 이런 오보를 하게 된 과정을 보면은 학교 측과 경기도교육청이 해경이 현장에서 파악했던 잘못된 정보를 여과 없이 받아들였고, 사실 그 단체들, 그 기관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저희 역시 그 정보에 대해서 조금 더 검증을 했으면 좋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어쨌든 여러 기관들이 확인한 정보를 저희가 그대로 받아서 보도를 한 셈이 됐거든요
 
[심영구]
그러니까 저희도 그런 걸 좀 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희도 아침에 이 사고 나고서 팀이 내려갔는데 내려갔다가 '이거 전원 구조될 텐데, 구조됐을 텐데, 설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대명천지에 설사 한 두 명의 피해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대형사고가 날 수 있겠어?' 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고 먼저 내려가는 후배들한테도 너희 가서 그 날 상황 정리하고 내일 올라올 거야. 맛있는 거 먹고 와. 거의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처음에는. 그러다가 제가 연락 받고 내려간 게 1시 좀 넘어서였는데…
 
[김성준]
그러면은 이미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전 사실 이 때 당시 8시뉴스 앵커를 했기 때문에 출근이 늦어서… 그나마 빨리 나와서 10시 30분쯤 회사에 출근을 했는데 출근해가지고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걸 보고 이게 무슨 일이냐 생각을 하면서 얼핏 떠올렸던 게 과거에 서해페리호 침몰 사고 시절 기억이 났어요.

그때 제가 회사에서 주니어 기자였을 때니까 제일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는데,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근처 못 미쳤을 때인가 다시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야 별거 아니란다 그냥 돌아와라.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러고 배가 고프니까 금강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자고 점심 먹는 도중에 다시 전화가 와서 부랴부랴 야 이거 큰 사건인 것 같다 다시 돌아가라 그래서 다행히 거꾸로 돌아오지 않다가, 밥 먹다가 현장으로 달려가서 그 참사를 취재한 기억이 있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어요 사실 처음에 야 이거 큰일 아냐. 했다가 일단 현장에 내려가야 하는 기자들, 속보를 해야 하는 기자들 말고, 몇몇이서 점심을 먹으러 가서 보니까 전원 구조 소식이 들리길래 점심 시작할 때는 큰일 아니겠구나 싶었는데 점 점 점 더 점심 끝나갈 때쯤 되어서 이 상황이 이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가 파악이 됐고, 그때부터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던 거잖아요.
 
근데 어떻게… 이거부터 정리를 하고 갈까요? 사실 취재기자 입장에서 볼 때는 해경이 그렇게 얘기했고, 경기도 교육청이 그렇게 얘기했고, 학교 측에서도 그렇게 얘기를 했고, 가장 절실한 당사자들이 전원 구조라는 얘기를 했고 그게 단지 현장 해경의 잘못된 정보고 똑같이 회람된 거라는 걸 몰랐던 상황이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기자가 현장에 갈 수 있었던 상황은 아니고...
 
[류란]
제가 나중에 (국회)의원실 발로 해경이랑 청와대가 그 당시에 긴박한 순간 당시에 주고받았던 핫라인 녹음 파일을 리포트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그 녹음 파일 시간대별로 나옵니다. 분, 초 별로 나와요. 그 해경이랑 청와대가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이. 거기 보면 청와대도 사실 그 잘못된 보고, 전원 구조를 낮 시간 11시 대까지도 믿고 있거든요. 이게 물론 저희의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 당시의 어떤 정보보고 체계라든지 그걸 검증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았나, 나중에 한 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김성준]
그렇죠. 그럼 이제 사건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들어가보죠. 이렇게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태도. 그리고 해경 123정 도착했는데, 해경은 뭘 한 건지? 이 때 시점이라는 건, 우리가 화면으로 생각했을 때 배가 한 1/3쯤 가라앉았다고 해야 할까요? 갑판의 모습은 보이고…
 
[심영구]
한 9시 40분? 나중에 해경에서 제공한 영상 통해 재구성 해보고 또 교신 내용들 보면서 죽, 9시 쯤 배가 기울기 시작한 때부터 해서 재구성을 많이 했었는데. 보면은 가장 먼저 구조됐던 사람들이 선장과 선원이잖아요. 이준석 선장과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다 밖으로 나와서 기울기 시작한 배에서 갑판이나 난간 쪽으로 나와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고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123정은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와서, 소식을 들은 다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해가지고 선장들하고 선원들이 나와 있는데, 거기서는 몰랐다고 주장을 하죠. 몰랐다고 주장을 하면서 그 사람들을 가장 먼저 구한 거고. 그 사이에 인제 방송실에서는 지금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했고. 또 아이러니한 거는 그 방송을 했던 직원은 죽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방송을 했던 직원은 그 방송만 하고 있다가 탈출을 미처 못했고요. 그니까 그렇게 방송실에다가 이렇게 해놓고 있어 정도 지시만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나 몰라라 탈출을 한 거고. 해경 123정은 그 큰 배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 같은 건 안 해보고, 탈출하라는 방송도 처음에는 했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죠. 그런 방송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만 구해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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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사실 첫날인가요, 둘째 날인가요. 둘째 날 정도였던 거 같은데 해프닝 같은 게 있었습니다. 며칠 더 지난 다음인데, 해경 대원 중 한 명이 기울어져가는 배 위에 올라가서 구명벌이라고 하는 거를 발로 차가지고 떨어뜨리려고 노력하는 게 영상에 있어서, 그걸 가지고 일종의 미담처럼 이렇게 용감하게 기울어져 가는 배에 올라가서 노력을 했다.

그런 거를 기사를 쓴 적도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전혀 사실은, 도움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거하고 있을 시간에 사실은 들어가서 안에 누가 더 있는지. 또 있으면 나오라고 하는 그런 거를 해야 하는 시간에, 풀리지도 않는, 철사를 묶어 놔서 풀리지도 않는 구명벌을 발로 차고 있는 해프닝 같은 것도 있었고…
 
[김성준]
우리가 사실 나중에 영상을 통해 확인한 거지만, 해경 123정이 선원들을 구조하고 있는 시점에 바로 옆에 창문을 통해가지고 학생들이 구조를 요청하는 모습도 화면에 잡힌 적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해경 123정 선원들이 전혀 안에 사람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하긴 어려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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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구]
나중에 창문을 부수면서 그걸 통해서 사람을 구조하고, 그런 장면도 나오긴 하는데. 어쨌든 초반 대응이라는 면에서 너무나...뭐 나름대로 열심히는 했어요. 뭔가는 열심히는 했는데. 방향성에서 전혀 맞지를 않았고. 매뉴얼 없이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해경이나 아니면, 오히려 민간어선이나 민간구조팀에서 와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뭐 그런 좀 한심한 상황이었죠.
 
[김성준]
뭐 사실 제가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포인트가 여기라고 말씀 드리고 시작을 했습니다 만은,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먼저 탈출하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방송이 있었고 또 해경 123정은 도착해서 사람들을 제대로 구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 부족했고. 이 사실 어떻게 보면 한 몇십분 간의 짧은 시간의 상황인데, 이 상황이 훨씬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을 정말 기록적인 참사로 만들게 된 그런 포인트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고 나서 배는 완전히 침몰했고, 이제 기나긴 고통의 날이 시작이 된 거죠
양두원 기자는 언제 내려갔어요?
 
그래픽_세월호 수색
● 처음 겪어 보는 재난급 사건

[양두원]
저는 다음 날 내려갔습니다. 당일 날에는 제가 그때 검찰 2진이어서 검찰에 가 있었는데, 대부분 아마 그랬을 거예요. 11시 조금 넘어서부터 사고 소식이 전해지고 속보 자막 뜨고 그랬는데 점심 먹기 직전에 전원 구조 자막 뜨니까 다른 사람들도 큰 거 아니구나. 밥 먹으러 가자 그랬는데.

밥 먹고 나니까 상황이 완전 바뀐 거죠. 그 다음에 내려갔었는데 그 저희는 큰 재난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촛불 집회 같이 큰 집회나 사건 사고 같은 거는 한 적이 있었어도. 거의 재난에 준하는 이런 사건을 취재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김성준]
그럼 첫 번째 재난 취재 경험이었나요?
 
[양두원]
그렇죠. 뭐 예전에 뭐, 강원도 고성 양양 산불, 이 정도가 큰 건이었고. 그때 낙산사 불타고 했을 때요. 그 정도였고. 제가 지금 만 10년 차인데 제가 지금까지, 그리고 그 이전 삼풍백화점 그 이후로 따져도 이렇게까지 큰 재난사고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김성준]

그 다음 날 현장에 도착해보니까 첫 인상이 어떠하던가요?
 
[양두원]
충격이었죠. 이런 처음에 이렇게 체육관에 들어갔을 때 풍경을 봤을 때 사람들의 표정, 소리 이런 것들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오히려 제가 쓰나미, 동일본 지진 갔을 때 그 때보다도 오히려 더, 그 장소가 되게 압축적이잖아요.

모든 게 다 있잖아요. 쓰나미 때는 모든 게 다 있으니까. 심리적인 충격이 조금 덜 할 수 있는데. 체육관하고 팽목항하고 다 보면. 또 한국병원, 처음에 시신들 왔던. 장소들이 협소하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표정이나 소리 이런 것들이 직접적으로 바로 물리적으로 몸에 전해오는 거잖아요. 그 충격은 생전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팽목항_265
● 함께 모여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어머니들 

[심영구]
저희 같은 경우도 현장에서 중계를 계속 하면서, 팽목항에 주로 있다가 나중에 동거차도로 들어갔는데. 팽목항에서 첫 날 가가지고 피해자 가족들. 희생자 가족들이 다 살아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소식들을 기다리면서 팽목항에 있을 때인데.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다들, 아무 것도 들어오는 게 없었어요.

배가 들어오는 바다를 향해 서가지고 다들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 뒷모습을 이쪽에서 바라보면서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 때 사진을 제가 한 장을 찍었는데 핸드폰으로 그 이후로는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어요. 그 이상 제가 사진을 찍는다는 것도 힘들었고…
 
그 다음에 저는 되게 기억 남는 순간 중 하나가 둘째 날 밤이었는데, 인제 다 천막 쪽에, 다들 지치기도 했지만 계속 얘기들도 하고 있을 때인데 어머니들 위주로 죽 수십 명이 모여가지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앉아가지고 제발 살려달라고 제발 구해달라고 통곡을 하면서 애원하듯이 기도를 하는데, 같이 있던, 다른 남자 기자들이나 해서 다 같이 그냥 저희도 그냥 꺼이 꺼이 울었거든요. 너무 참혹한 광경이고.

그때 순간이 사실 저는...어두워져 갈 때의 팽목항 바다를 바라보던 가족들의 뒷모습, 그리고 둘째 날 밤에 가족들이 다 같이 무릎 꿇고 앉아가지고 통곡하던 모습. 그게 되게 잊혀지지 않는...첫 날 둘째 날의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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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사실 첫 날 둘째 날만 하더라도 우리도 안에서 그 취재한 내용을 가지고 보도를 하면서 사실은 희망이 있었잖아요. 물론 전원을 구조하거나 하는 가능성은 거의 떨어졌겠지만. 어쨌든 몇 명이라도 생존자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배 안에 공기가 남아 있으면 며칠은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라는 가는 희망이지만 희망이 있었고.

또 어떻게 보면 이 참사의 규모, 이게 어떤 영향을 우리 사회에 미칠지에 대한 감이 첫 날, 둘째 날, 셋째 날까지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이제까지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여러 가지 대형 재난 사고에 준해서, 그런 감을 갖고 취재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 그래서 저희도 초반기에 실수도 많았고. 어떤 느낌의 정도가 덜했다고나 할까?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류란 기자는 언제 내려갔어요?
 
[류란]
저는 초반에 10일 가까이는 서울에서 취재를 하다가 4월, 이십 며칠 경에 목포로 가서 검경수사본부가 차려진 목포해경에서 그 선원들이 조사를 받고 그 다음에 인제 근처에 있는 목포지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하는데 그 때 선원들과 선장 얼굴을 직접 보고, 그때가 유일하게 선원과 선장과 그 사람들의 육성을 통해서 이 소고에 대한 본인들의 책임 부분이라든지, 감정을 유일하게 직접 컨택해서 볼 수 있었던 때였는데요. 그 때 한 10일 가까이 목포에서…
그래픽_해경
해경 청사에 붙어 있던 표어 "안전한 바다. 행복한 국민"

[김성준]
류란 기자 취재파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있는데, 거기 목포해경을 취재하러 가서 해경 청사에 표어가 있었다고요.
▶ [취재파일] 우린 왜 세월호가 불편해졌나? ①
 
[류란]
네. '안전한 바다 행복한 국민'이라는 표어인데, 해경 건물마다 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성준]
그 표어가 정말 역설적이었다는 느낌 많이 들었어요. 양두원 기자가 현장을 취재하면서 외신들도 2-3일 뒤에는 외신들도 많이 왔었잖아요. 그 외신들을 만나가지고 느낀 점도 많이 있었다고 하던데…
 
[양두원]

네, 저희 제휴사인 채널뉴스아시아 CNA 하고 같이 일을 했었고요, 저희 다른 제휴사인 일본 니혼TV 하고도 같이 중계를 잡는 데 있었고요. 다 식당 건물 옥상에 거기서 외신사들이 다 중계를 했는데, 거기 CNN하고 아사히TV 있었고, NHK는 안 보였던 것 같고, 여러 방송사들이 많이 왔었어요.

그 친구가, 아사히TV에 있는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되게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는데. 무슨 말이었느냐면. '아, 한국이 되게 대단한 나라가 된 거 같다.'고…'이런 사건에 이정도의 많은 국가의 많은 외신들이 와서 취재를 한다는 게, 한국이 되게 예전보다 커진 것 같다'는 말을 한 거예요.
 
[김성준]
말을 해도 그렇게 하냐
 
[양두원]
'벙글라데시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면 이렇게 많은 외신들이 왔겠느냐'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 말이, 너무 기분이 상했죠. 기분이 상했는데… 걔네들은 어떤 심정적인 게 우리하고는 다를 테니까 이걸 받아들이는 게. 걔네들은 정말 사건사고로만 받아들이는 거고. 우리는 정말 보면 가족이나 친구가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정서적인 깊이 같은 게 다르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구나 싶었는데 그런 거는 정말 많이 많이 기분이 나빴죠.
 
[심영구]
그렇기도 하고. 한국이면 그래도 나름대로 올림픽도 치르고 월드컵도 치르고 경제규모도 많이 성장하고 나름 선진국 반열에, OECD에도 가입했고 그런 나라에서 이런 어떻게 보면 후진적인 참사가 났다는 게 너무 대비가 된다는 그런 느낌도...
 
[김성준]
그 동안 침묵하고 있던 조을선 기자, 조 기자는 사실은 현장에도 초반에 갔었지만, 사실은 이 참사 내내 처음에는 실종자 가족들, 결국은 희생자 가족들 취재를 전담해서 그분들하고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낸 걸로 제가 아는데, 초반부터 해서 유족들을 취재한 에피소드라고 할까요, 어떤 얘기들을 해줄 수 있어요?
 
팽목항
● 소명 다하지 못해서…"죄송합니다."

[조을선 / 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희생자 가족 취재 담당]
일단 첫날 팽목항으로 내려갔는데요, 가서 들었던 생각은 내가 여기 왜 왔는가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김성준]
어떤 고민인 거죠?
 
[조을선]
기자로서 내가 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일단은 기자라고 왔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기자들을 이미 불신하고 있는 상태였고, 외신 기자들에게 오히려 매달려서 이야기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또 실종자 가족들이 직접 바다에 나가겠다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 해서 배를 끌고 나가려고 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보고하는 것뿐이고.

뉴스에는 물론 정부의 브리핑 위주, 보이는 상황 위주로 나갔던 것이었고. 제가 알고 있는,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없다라는 유족들의 말이나, 이런 것들은 그저 현장에서 다 사라졌던 소리처럼 됐던 것이 사실이고. 스스로 기자는 분명 약자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이고 진실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는 그런 순간까지 맞이하게 됐는데. 이후로 안산에 내려가게 됐어요.

안산에 가서 그 때부터는 기자로서 취재를 하자는 생각은 안 했어요. 일단 내가 이들의 마음을 알아야겠다. 이들과 공감을 해야겠다. 내가 이들을 취재대상으로 여기는 순가 이들은 제가 들고 있는 마이크, 그리고 선배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부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정말 아무 것도 들지 않고 갔는데...음..분명 기자로서 다하지 못한 소명이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죄를 했죠. 죄송합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유족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 용서하기 시작했던 거 같고. 그 다음부터는 이 분들께서 마이크와 카메라를 부탁하셨고, 그 다음부터는 이분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조금씩 나눌 수 있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반성하는 시간이 됐던 것 같습니다.
 
[김성준]
사실 조을선 기자가 안산에서 계속 유족들과 교류를 하면서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정말 마음을 열어놓고 그분들 심정을 공감하려고 노력했던, 그 노력의 결과로 저희 SBS 8뉴스는 제가 당시 앵커를 하면서 직접 조을선 기자가 주선을 해서 유족들하고 처음으로 인터뷰도 직접 할 수 있었고, 그분들의 진정한 뜻이 뭔지 뭘 원하는지 조금이라도 한 발짝 더 가까이 가서 취재를 하려는 노력이 조을선 기자가 현장에서 유족들 마음을 열었던 어떤 결과 아닌가 싶기도 해요.
 
좀 앞으로도 이야기를 하면서 유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오겠습니다만. 지금 조을선 기자가 이야기한 먼저 가서 마음을 열고 그분들 말씀을 진정성 가지고 들으려는 노력, 이게 사실 기자로서 중요한 포인트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유가족 얘기는 계속 할 테니까 잠시 뒤에 얘기를 좀 해줬으면 좋겠고요.

● 20년 전 사회부 기자였던 기자의 반성

저는 사실 지금부터 한 20년 전에 아시아나 항공 여객기도 추락했고, 삼풍백화점도 무너졌고, 서해페리호가 침몰했고 성수대교가 붕괴했고 이런 시절에 정말 어린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 저는 그랬어요. 솔직하게 고백을 하자면 그런 재난의 현장에 도착할 때, 막 에너지가 솟고, 여기 가서 정말 열심히 일하고 취재해서 좋은 팩트 하나라도 더 챙기고, 멋있는 리포트 만들어서 내가 한번 잘 나가봐야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생각이 참 많았었거든요. 근데 여러분들, 돌아가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해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조을선 기자도 처음 도착했을 때 심정을 잠시 이야기했는데, 참사 현장 처음 도착했을 때 각자의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있었나요. 심영구 기자부터 한번 이야기해보시죠.
 
[심영구]
음…어… 저는 일단 그날 제가 전에 편집부에 있었다는 이력 때문에 그날 8시뉴스 현지 앵커 연결 코디네이터 역할을 좀 같이 했거든요. 그때는 일단 사고내지 말고 어떻게든 포인트 잘 잡아서 방송을 해야 된다는 게 전부였고, 거의 전부였고. 중간 중간에 시간 뜰 때 제가 취재를 하고 그랬던 건 아니니까 처음에는. 

그 다음에는 중계차, 현장 중계를 계속 물리면서 그러면서 돌아가니까 거의 기계적으로 15분 지나면 또 들어가고 15분 지나면 또 들어가고 그리고 또 밤새고, 그리고 2시간 자고 나와 또 들어가고. 중간 중간에 가족들이 바다를 나가겠다. 돌아왔는데 성과가 없다. 상황이 어떻다. 그런 얘기들을 단편적으로 접하다 보니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간 것 같아요.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는데 내가 정말 여기서 가족들이 원하는 얘기도 있고 현장에서의 상황이 잘못 전달되고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저도 거기 갔던 기자들 중에는 조금은 고참인 편에 속했는데, 다른 선배들도 계셨지만, 그런데 제가 거기서 뭘 컨트롤 하거나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되게 변명 같지만 아니었거든요.

그런게 처음에는 정말 정신 없이 지나갔고.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고, 할 거는 많고 그러니까 지나갔는데 조금 지나니까 되게 무력감 같은 게 느껴졌고. 그렇게, 그런 게 각자 현장이 비교적 좁은 지역에서 벌어졌다고 하지만 현장이 여러 군데로 나뉘어져 있고, 나눠져 있는 현장에서는 기자들이 여러 명 있지만 각자 흩어져서 취재를 하고, 일들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 것들이 모여서 인제 그런 취재했던 팩트들이나, 모여서 저희 뉴스나 속보로 연결이 되는 건데, 그런 것들은 서울 에서 컨트롤 하는 건데, 거기까지의 의사소통은 분명히 안 되는 부분이 있고. 각자 쪼개져 있으면서, 저는 그런 생각들을 좀 지나서 하게 되지 않았을까.
 
가족들이 좀 전에 조을선 기자가… 저희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 쯤에는 이미 가족들이 불신하기 시작하는 거죠. '니 네 우리 얘기들 별로 넣어주지도 않고. 니 네 마음대로 썼잖아.' 라는 식의 상황들이 벌어지고서, 아차, 싶은 부분이 생겼는데. 이미, 뭐라고 할까요. 골든타임이 좀 지나갔다고 할까요. 그런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김성준]
양두원 기자는. 영상취재기자는 얼핏 생각하기에 재난의 현장이든, 즐거운 현장이든, 현장에 도착해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남들이 촬영하지 못하는 정말 한 컷의 의미 있는 보도 영상. 이거에 가장 큰 욕심을 내지 않을까 싶은데. 내려 가면서 처음에 현장에 도착해서 느낀 게 어떤 게 있어요?
 
[양두원]
그 아까도 그러셨잖아요. 예전의 큰 사건들, 삼풍이니 그런 것들, 에너지가 샘 솟는다는. 사실 그게 어떤 기쁨이나 쾌감 그런 감정보다는, 일단 우리가 현장에 가서 그 동안에 보지 못했던 스케일의, 아니면 다른 성격의 그런 것들을 눈으로 보게 되면, 일종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거죠.

저도 동일본 대지진 때 자원해서 갔거든요. 그걸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눈으로 보고 담고 싶었고, 그리고 예를 들어서 이번에 진도 때도 배를 타고 가라앉은 현장까지 근접을 하잖아요. 여기 기자들도 배를 타고 가서 보셨겠지만 그 현장을 보면 정말 압도적으로 몸에 와 닿는 게 있어요. 가면 배들이 정말 엄청나게 많거든요. 뭐 구조선, 바지선, 뭐 해경 뭐 해서 거기에 정말 몇 십 척이 와있어요.

거의 예를 들어서 전쟁에서의 상륙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거기 있는 걸 보게 되면. 이 일들을 가치를 생각을 하고 봐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그거 자체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어요 워낙에..
 
[김성준]
인간이 사라지고, 현상만 남는 거죠.
 
[양두원]
그렇죠. 이 비주얼이 워낙에 강력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거를 확인해보고 싶기도 하죠. 저희가 예를 들어 화재 현장에 갔을 때도. 이거를 왠지 내가 잘 담아, 잘 찍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위험한 생각이거든요 그게.
 
[김성준]
그게, 그게 맞는 얘기에요. 제가 아까 서해페리호 때, 성수대교 붕괴 때 이야기도 했지만, 잠시 뒤에 우리가 언론에 대한 이야기 언급할 때 더 이야기하겠지 만은 사실 취재 욕심이 사건의 본질로부터 눈을 가리고, 정말 우리의 욕심만 챙기다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반성할 점이 많죠.
 
류란 기자가 우리 SBS 보도국에서 글 쓰거나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면 가장 감성이 넘치는 기자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거 같은데.. 류란 기자의 첫 인상은 어땠어요?  또는 자신의 각오는. 각오라기 보다 처음 취재에 임하는 태도는?
 
[류란]
저는 지금 현장 이야기 해주셨는데,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아주 초기에 며칠은 서울에 있었고, 그 다음에 간 현장이 선원들과 선장이 조사를 받는 곳이었고, 저절로 얼굴을 익혔고, 그 상태에서 서울로 돌아와서 그 이후에 제가 죽 했던 일은. 그 때 해경 123정이 찍은 영상도 왔고요. 그리고 VTS 랑 그 근처에 있던 배가 교신했던 교신록도 있었고. 저는 주로 9시 25분에 123정이 멀리서 세월호가 보입니다.

세월호가 보이는 순간부터 11시 반 경에 세월호가 거의 가라앉는 그 2시간을 재구성하는 일을 거의 했었어요. 보면은 이게 아주 여러 주체들이, 가해자로 가담한 사고거든요., 해경, 현장에 출동한 123정 뿐 아니라 선원 선장 제주VTS 진도VTS... 그 현장에 해군도 왔었고, 소방 헬기도 왔었어요.

그리고 그거를 보고를 받는 윗 선도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각각의 그 2시간동안 각 주체들이 뭘 하고 있었고, 무슨 실수를 하고 있었는지를 계속 축적해가면서 저는 2시간을 계속 재구성하면서 기자 이전에 어떤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서 그 2시간을, 1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2시간을 계속 재구성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김성준 선배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서해페리호가 가라앉았다 이런 거는 제가 취재를 안 해서 모르겠지만 일시적으로 뭐라고 할까, 사고의 느낌이 강한데, 제가 본 세월호는 너무 많은 순간에 이렇게 큰 재앙으로 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기회가 너무 많았던 거죠.
 
[김성준]
중요한 얘기예요. 중요한 얘기고 사실 지금 그것도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얘기를 하면 우리가 그 시절에 서해페리호나 성수대교 붕괴 같은 것에 대한 보도를 제대로 잘 못했기 때문에 당시 시청자였던 류란 기자가 그냥 단순한 사건, 이건 그냥 배가 하나 침몰한 거, 그냥 다리가 하나 무너진 거. 이렇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때 저희도 취재하면서 느꼈던 것이 서해페리호 침몰도 그렇고, 성수대교 붕괴도 그렇고 세월호 못지 않게 각자 자기 책임을 져야 하는 수많은 각자 파트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종합체가, 그런 참사로 번진 거였는데 그런 거에 대한 진정한 취재와 보도를 좀 소홀히 했던 거 아닌가 하는 반성도 좀 들지요.
 
자, 그래서 4월 16일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 후 1년이 됐고. 이제 그럼 한번 사건의 당사자들 어떻게 변화했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런 걸 알아볼까요? 류란 기자 이야기 꺼낸 김에, 지금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잖아요. 재판은 어떻게...결과는 언제 나올 것 같고, 지금까지 상황은 어떻습니까?
 
[류란]

네, 이준석 선장 같은 경우에 작년 11월에 징역 36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살인하고 살인 미수 혐의로 기소가 됐었는데요. 지금 본인은,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법원에 감형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준석 선장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선원들이 살인 또는 살인미수 혐의로 지금 재판이 진행 중이고요.
 
[김성준]
지금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인 거죠?
 
[류란]
네, 그렇습니다.
 
[김성준]
선원이 14명이었나요, 15명이었나요?
 
[류란]
선장 포함해서 15명이었습니다.
 
[김성준]
이준석 선장은 일단 1심에서 살인과 살인 미수 혐의가 다 인정이 됐고. 그래서 36년 형을 일단 선고를 받았고, 재판은 꽤 갈 거 같죠?
 
[류란]
지금 진실공방이 이어지고 있는데...
 
[김성준]
어느 부분에서 아직도 진실공방이 이어지는 거예요?
 
[류란]
가장 최근에 있었던 거는 제가 알기로는 퇴선 명령 부분인 거 같아요. 선장은 나는 분명히 퇴선명령을 내렸다. 그것에 대해서 조타실 있었던 선원들의 말이 엇갈리고 있는데, 검찰이 성실하게 선원들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들을 내고 있는데. 예컨대 해경 123정이 찍었던 핸드폰 영상에서 음성을 복원했더니 배 밖에서 찍은 핸드폰 영상인데도 가만히 있으세요, 배에서 내리지 마세요 라는 음성이 나오는 거를 검찰이 복원을 했어요
▶ "'가만히 있으세요' 안내 방송"…화 키웠다

[김성준]
그건 이미 이준석 선장이 탈출한 이후의 시점이죠
 
[류란]
그러니까 퇴선 명령을 내렸다는 거는 말이 안 되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재판이 지금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김성준]
자, 조을선 기자. 희생자 가족들 저희가 그 동안 간간이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보도를 통해서 보기도 했고 그랬는데 조을선 기자는 다른 경로로 희생자 가족들과 교류를 하거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까, 그 동안?
 
[조을선]
당시 아무래도 취재했던 유족분들 같은 경우에는 간단히 전화를 한다든지, 아니면 제가 출입하고 있는 곳이 지금은 국회인데 국회에 유족분들이 종종 오세요. 그래서 그럴 때 뵌다든지 하면서..
 
단원고 등교 캡쳐_
● 화재 경보가 울리자 주저 앉은 아이들

[김성준]
어떻게들 지내시나요?
 
[조을선]
어떤 분들은 잊고 싶다. 다 잊고 돌아가는 게 가족들을 위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더 이상 살수가 없다. 그래서 생업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시는 분들도계시고요. 일이 좀처럼 아직까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 일이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다고 해서 농성장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분도 계시고요
 
[김성준]
이 대형 참사의 트라우마 라는 게, 저희가 최근 들어 몇 년 사이에서야 이 트라우마 라는 게 엄청난 거고, 사건이 해결됐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서야 알 수 있게 됐는데...이 유가족들도 여러 가지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조을선]
네, 아직까지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1년이 지났지만 그 때 그 상황인 그 상황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서, 단원고 학생을 잃은 한 어머니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 사망 신고를 하지 않으셨더라고요. 아직까지 그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고.
 
[김성준]
실종된 9명 중에 포함이 되지 않은, 사망이 확인된 학생인데도…
 
[조을선]
시신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보내지 못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심지어는 휴대폰을 정지시키지 않고 아직까지 아이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음성메시지를 남긴다든지 전화를 받으라, 뭐 문자를 남기면서 대화를 나눈다든지 아직 그때 상황 그대로인 유족들이 있었어요. 그건 트라우마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 속에 지내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김성준]

지금 휴대전화 이야기 나와가지고 하는 얘기지만, 최근에 기사를 보니까 단원고 학생이겠죠, 희생된 학생의 아버지가 아직도 아이의 핸드폰 번호로 문자를 보내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답이 와서 깜짝 놀라가지고 보니까, 그 휴대전화 번호를 이제 번화가 이동이 됐을 테니까 다른 사람이 그걸 받아서 그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서 보냈던 문자였다. 최근 저희 보도에서도 나온 적이 있었잖아요.
  ▶ 세월호 희생된 아들에게 온 답장…"아빠 사랑해"

[류란]
제가 리포트를 했었는데…
 
[김성준]
아, 류란 기자가 했던 건가요?
 
[류란]
제가 그 리포트를 하면서,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계속 펑펑 울면서 했던 기사였는데. 지금 조을선 기자가 말한 사례와 연결이 됩니다. 해당하는 아버님도 아들이 사망했다는 걸, 아직 본인 어머님, 사망한 학생의 할머니가 아직 모르세요. 그래서 희생자 명단에 이 아이가 이름이 올라갈 경우에 할머니가 알게 되실까 봐 아버지가 너무 노심초사를 하시고 있고. 요즘 할머니가 부쩍 찾으신대요. 애가 1년 동안 안 보이는 거잖아요.
 
[김성준]
뭐라고 핑계를 만들어서 기신기신 하루 하루..
 
[류란]
그냥 속이 타죠. 멀리 여행 갔다. 공부 중이다. 시험 중이다. 이러면서 버텨왔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을 계속 어떤 거짓말로, 그 할머님을….참… 답답합니다…
 
[김성준]
단원고 학생들, 단원고 2학년 학생들 중에 생존한 학생이 몇 명이든가요? 제가 좀 정확하게 숫자가 기억 안 나는데, 그 학생들도 역시 여러 가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걸로 아는데..
 
[조을선]
네, 당시에, 혼자 살아남은 거 아니냐, 친구를 버리고 온 거 아니냐, 이런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실제로 인터넷 상에서도 생존 학생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댓글이라든지, 이런 것들로 인해서
 
[김성준]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짓들 한 사람들 있어요.
 
[조을선]

책임 지지 않는 그런 말들을 하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았던 학생들이었는데, 이후에 계속 치료를 받고. 같이 생존 학생들끼리 시간들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몇 가지 해프닝들이 있었죠. 뭐, 갑자기 화재 경보가 울렸는데, 당시에 아무도 제대로 빠져 나오지 못했다는 거예요
 
[김성준]
학교에서?
 
[조을선]
네. 당시 실제로 불이 난 건 아니지만 경보가 났을 때, 다들 주저앉거나 울거나... 그때 빠져 나왔던 것에 대한 죄책감 이런 것 때문에 제대로 된 생활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죠.
 
● 진짜 책임자들은 핑계대는데…죄책감 시달리는 '의인 義人'

[김성준]
류란 기자, 김동수 씨라고 있잖아요. 사고 당시에 소방 호스를 풀어서 학생들 10명 가까이 구조하고, 저희도 그때 아주 의인으로 보도를 하고 그랬는데. 요즘 아주 이상한 이야기가 들렸어요.
 
[류란]
네, 그것도 최근에 제가 취재했던 내용이었는데요. 김동수 씨가 자해를 했죠. 손목을 그은 건데.
▶ 세월호영웅 김동수씨 "자꾸 생각나는데 잊으라고만"
▶ '세월호 의인' 김동수 씨 자살기도…생명 지장없어
 
[김성준]
제주도가 사는 데죠?
 
[류란]
집이 제주도에 있습니다. 제주 자기 자택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음.... 참.... 그것도 참...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정말 결정적인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든 빠져나가거나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현장에서 핸드폰 영상을 보면 김동수 씨가 빠져 나와도 자기 목숨을 구할까 말까 하는 상황에 그 순간에 애들 목숨을 구하고 있거든요. 소방 호스 2개를 연결해서, 하나를 연결하면 끊어져서 애들이 못 올라오니까. 정말 죽기 살기로 10명을 구한 사람이 더 구하지 못하고 마지막에 나온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환영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고, 그것 때문에 트라우마 치료를 자비를 써가면서 받고 있어요.

[김성준]
어휴...
 
[류란]
그런 걸 보면서 세월호 참사가 4월 16일 끝나지 않고 우리가 1년 내내 끌고 오고 있구나 하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김성준]
그 김동수 씨 경우도 그렇지만, 지금 류란 기자가 좋은 얘기했는데, 희생자 가족들 조을선 기자 말대로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고, 심지어는 김동수 씨처럼 이렇게 직접 자기가 뛰어들어서 10명 가까운 학생 생명을 구한 사람조차도 더 구하지 못 햇다는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고. 근데 정작 사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빨리 이 상황에서, 이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고. 또 책임을 피해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다...
 
● 유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폐기하라고 요구하는 이유

[심영구]
그러니까, 일관되게 처음부터 이야기했던 게, 진상 규명, 재발 방지, 책임자 처벌. 딱 3가지 얘기들을 했는데. 이 부분들이, 그 3가지 중에 뭐가 진척이 됐나. 돌아보면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진척된 게 하나도 없다, 또는 거의 없다. 라고 유족들이나 국민대책위라든지 쪽에서 주장하고 있는데 저는 그게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일단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되게 반 쪽짜리라는 이야기, 유족들도 계속 농성도 하고 한 끝에 힘들게 됐는데 그 후속 작업으로 진상 조사를 위한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원래는 1월부터 조사위원회 활동이 시작됐어야 하는데, 그 조사위의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하는 시행령을 제정하는 문제를 놓고서 지금까지 다투고 있거든요.

특별조사위에서는 특별법이 있고, 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는 게 시행령과 시행규칙인데, 조사위에서는 특별법에 규정된 대로 거기서 할 수 있는, 원래 길어야 시간이 1년 6개월이란 한정된 시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최대 범위 내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 인력이든 지원이든 그런 부분들을 시행령에 담아서 제출을 했는데, 그걸 해수부에서 다시 조정해서 낸 거는 훨씬 그것보다 후퇴한 내용들. 그리고 그런 식이 되니까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시행령이 통과가 안되어가지고 특별조사위 활동도 지금까지 멈춰있고요, 올해 들어서 넉 달이 지났는데 멈춰있고....
 
[김성준]
시행령 문제를 비롯한 세월호 특별법 사후 조치 문제, 진상 규명 문제 잠시 뒤에 좀 더 깊이 있게 심영구 기자와 함께 이야기해 보겟습니다만은... 지금 진상 규명, 재발 방지, 사후 조치(책임자 처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진상 규명 부분도 잘 안되고 있고, 재발 방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는 거, 사후조치도 마찬가지고요. 재발 방지 부분은 어땠던 것 같아요?
 
[심영구]
재발 방지라는 것이 사실...딱 그런 질문을 던져 보면 될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지금 다시 일어나선 안되겠지만 세월호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했을 때 그럼 우리는 304명 이라는 희생자를 낳지 않고 전원은 아니더라도 상당 인원을 구조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을 던져 놓고서 거기에 자신 있게 그럴 수 있다고 답할 수 있는 대통령이든 총리든, 정부의 책임있는 당국자가 누가 있을까? 저는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만 봐도 명확한 것 같고. 그 이후에도 사실 우리가 상황은 다르지만 크고 작은 안전 사고들은 끊이지 않고 났거든요. 그러면서 세월호를, 항상 우리 언론들이 비판도 그렇게 했지만 세월호 사태를 겪었는데도 또 이런 사고가 났단 말이냐, 그런 얘기를 했는데 바뀌지 않는 부분이 계속 존재하니까 그런 상황인 것 같고.
 
[김성준]
사실은 그러니까 이게 우리 사회 전체가, 국가 개조라는 대통령 이야기까지 있었지만 그 말만큼이나 사회 지도층에서도 바뀌어야 되고, 또 사회 저변에서 우리 국민들 스스로가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 부분도 많은 거고. 그런데 재발방지와 진상 규명 부분에서 안 바뀌는 것의 가장 큰 이유들은 우리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는 데에서, 이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여러 가지 법적이거나 정치적인 조치들을 사실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란 말이죠.
 
더 나아가서 국민 의식 면에서 제가 깜짝 놀랐던 게 뭐냐 하면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나서 한 석 달 쯤 지나고 나서인가요, 불과 석 달 쯤 지났을 때. 세월호 참사 터지자마자 해양수산부에서 앞으로 연안여객선의 예를 들어서 승객들 탈 때 신원검사라든지 여러가지를 엄격하게 하겠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원칙을 지키겠다 이렇게 조치를 하고 나서, 그게 처음 시행된 날, 어디 언론 보도를 보니까, 불과 3개월 지났을 때에요. 언론 보도의 내용이 민간 여객선 승객들 탑승할 때 신원 확인 절차가 복잡해지다 보니까, 민간여객선, 연안여객선 타는 승객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이런 기사를 보고서 제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건 진짜 의식의 문제거든요. 인제는 사실은 물론 전혀 불편하지 않고 세월호 같은 참사도 없으면 가장 좋은 거겠지만, 참사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거든요. 근데 그런 생각을 참 못하고 있다. 너무나 우리가 빨리 잊어버리는 거 아니냐. 어쩌면 너무 빨리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고 있고요.
 
지금 1년 간 당사자들이 어떻게 지내왔나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지금 여러 당사자들, 희생자들 이야기도 들었고 생존자들 이야기도 들었고, 희생자 유족들, 그리고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 그리고 해경 이야기도 했습니다 만은, 양두원 기자가 한번 이야기해보겠어요. 현장에 갔을 때 또 다른 사건의 당사자들이 잠수사들이 있었단 말이에요. 잠수사들 여러 고생하면서도 희생자들 시신을 인양을 해서 참 유족들 품에 돌려주고 그랬었는데, 잠수다들 지켜 본 느낌은 어땠습니까.
 
이 질문은 뭐냐 하면, 사실은 희생자 가족들, 실종자 가족들이 굉장히 요구하는 게 많았어요. 그분들 입장에선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죠. 내 아들 딸들이 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데 왜 정말 잠수사들 100명 200명 투입해서 다 들어가서 다 찾아오지 못하냐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은 언론도, 우리도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압박하는 형식의 비판도 많이 했었고. 근데 현장에서 지켜볼 때는 좀 어땠던 것 같아요?
 
[양두원]
잠수사 분들 정말 민간에서 오신 분도 계시고, 아니면 군 UDT 나 이런 데서 오신 분도 있고 했는데. 그 분들은 정말 보면 존경심이 날 정도로 대단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딱히 바라는 것 없이 정말 사람 목숨 구하겠다는 일념만 가지고 오신 분들이 대다수였고요.
 
그런데 아쉽게도 그분들을 인터뷰하기가 되게 쉽지 않았어요. 그거를 공식적으로 막았거든요. 괜한 유언비어를 만들지 말자 해서 거의 막았기 때문에. 그분들이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나오지 않고는 되게 힘들었는데, 오히려 민간 잠수사 분들이 많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죠. 근데 잠수 현장에 직접 맹골수로죠 거기 가보니까, 물살이라는 게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요.

그 큰 배가 흔들릴 정도로. 제가 언뜻 생각하기에도 이거를 몇 사람이 들어가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했었는데 그러고 나서 한창 구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 구조가 되게 더디다, 바지선은 왜 없냐 등등부터 했는데, 그 UDT 인가 그 분이 글을 올리셨는데, 원래 그 사람들은 그런 환경, 그런 극한적인 환경에서 구조를 하는 거를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들인데 왜 그걸 투입 안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글을 올려서 그게 되게 많이 퍼졌던 것 같아요.
 
잠수사 분들이 예를 들어서 되게 조직적으로 투입이 되고 이런 문제들이 정확하게 처리됐어야 했는데, 그분들이 공식적으로 이야기는 안 했지만 뒤에서 말씀하시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만약에 정말 딱딱 해서 아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잠수사들이 정확하게 딱 딱 딱 들어가야 하는데 이 뭐 조직이 있잖아요 거기도. 해경하고 군 부대하고 조율 문제나 지휘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이 되게 복잡하게 얽혀있는 거예요.
 
단순히 사명감 가지고 왔던 사람들이 거기서 실망하게 되고, 또 떠나게 되고, 이런 것들이 계속 반복되는 거죠. 그것 마저도 세월호 사건을 이야기할 때 정말 많은 우리나라의 민낯, 병폐 이런 것들이 드러났다고 하는데, 그 중의 하나도 정말 최일선에서 구조작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를 들어서 심지어 얘네가 뭔가 성과를 내게 되면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이 바보가 된다고 하는 그런 식의 마인드까지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윗 분들이. 현장에 있는 분들은 대부분 그런 생각을 안 해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장비를 가지고 자기는 들어가겠다는 입장인데, 윗 분들이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해경이 직접 그랬다는 거는 아니지만, 다른 데서 구조를 해오면, 해경은 뭐하고 있냐, 이런 식의 말을 듣는 게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폭탄을 안고 싶지 않아한다는 거죠. 사실은 그건 직접 들어가는 잠수사들에 대한 모독이죠.
잠수사 캡쳐_640
● 국가가 버린 잠수사들…"장애가 생기거나 숨지지 않았잖아요."

[김성준]
정말 어떻게든 열심히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서 생존자라면 정말 고마운 일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희생자 시신이라도 가족 품에 돌려주겠다는 진정성, 의지, 잠수사들의 이지가 이런 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퇴화한 면, 희석된 면도 있었던 것 같고.
 
류란 기자도 이 리포트도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고생햇던 잠수사들 역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정부가 최근 잠수사들을 위한 보상 예산도 확보하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 떨치지 못하는 기억들…밤잠 못 이루는 잠수사들
▶ '세월호' 잠수사 뼈 썩어가도…보상은 차일피일
 

[류란]
네, 재원은 있어요.
 
[김성준]
얼마나 있어요?
 
[류란]
그것도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보니까, 장애를 입거나 사망했을 때에 대한 부분은 수난구호법에 돼있는데, 제가 만난 민간잠수사분들 하는 말이 양 기자도 말씀하셨는데 굉장히 물살이 세고 어려운 환경에서 조류가 세죠, 시신이 유실될 것이 우려돼서 제한된 잠수 횟수를 거의 3배 이상 초과해가면서 무리하게 잠수를 했던 거죠.

이분들이 실제 큰 골괴사라고 하는데 뼈가 썩고 있어요, 그런 병을 앓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치료비를 당신이 장애를 입거나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원은 있지만 지급할 근거가 없습니다 라고 안 주고 있는 거예요. 상당히 웃긴 일인데요.

지금 이 잠수사 분들 트라우마는 시신을 직접 더듬더듬 만져가며 안아서 뭍으로 가지고 나오는 그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지만, 이런 부분, 본인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는데 국가가 오히려 알아주지 못하고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이런 부분이 화병이 겹쳤더라고요. 트라우마가 본인들이 봤던 충격적인 장면들, 플러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울분까지 더해져서 큰 정신적인 아픔을 겪ㄷ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성준]
난감한 일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이 참사의 당사자들이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우리가 알아봤는데요.
이번에는 그럼, 정부와 또는 정책이나 정치권, 또 언론, 지난 1년 간 세월호를 겪고 어떻게 변화를 겪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세월호 1년 -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2부에서 이어집니다]
▶ [오디오 취재파일] 세월호 1년 -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②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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