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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완구 총리의 입…대일외교 전략 부재 '민낯'

[취재파일] 이완구 총리의 입…대일외교 전략 부재 '민낯'
어제(9일) 오전 이완구 총리가 서울에서 기자단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한다는 공지가 떴습니다. 한일관계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 일본이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라고 기술된 중학교 교과서를 통과시켜 대일 감정이 악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총리(정부)의 작심 발언이 있겠구나 생각하고 참석했습니다. 형식은 간담회였지만, 방송사 카메라까지 요청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향한 메시지를 던질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됐던 '조용한 외교' 딜레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완구 총리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얘기가 나왔습니다.

● "제가 도지사 시절에 말이죠"…업적 나열

이 총리는 일본 새 교과서에 기술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언급하며 "오늘은 역사적 팩트"만 갖고 말씀 드리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총리의 입에서 나온 '팩트'들은 대부분 충남 도지사 시절 업적들이었습니다. 우선, 이 총리는 도지사 시절 홍윤기 박사라는 분을 채용해 발간한 책 세 권을 순서대로 들어 보여줬습니다. <일본 속의 백제 나라> <백제는 큰 나라>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였습니다. 기자들 중에 독서 열의가 있는 분들은 가져가라며, 몇 부 더 가져오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총리는 도지사 재임 시절 일본의 구마모토, 오사카, 나라 등과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가서 한일 고대사에 대한 강연을 하면 500명 정도의 청중이 와서 관심을 보였다, 또 부여에 관광객이 자고 갈 데가 없어서 1조를 들여 롯데호텔과 아웃렛을 짓도록 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책들을 지은 홍윤기 박사가 안희정 지사가 되면서 그만 뒀다"면서, 도지사의 사관이 중요하다는 뉘앙스로 얘기하는 대목까지 와서는, 이 간담회가 한일관계를 위한 것인지, 정치인 이완구의 자기과시를 위한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했습니다.

● "역사적 팩트만 얘기"한다더니 의혹 제기

이 총리는 간담회 내내 역사적 팩트만 갖고 얘기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얘기한 근거들은 대부분 홍윤기 박사가 지은 책에 나오거나, 총리 개인이 일본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이 다였고, 팩트 없는 의혹을 제기한 것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황실의 유물창고인 '정창원'을 왜 공개하지 않느냐, 또 일본 한 지방의 고분 두 개 중 하나를 왜 열지 않느냐"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 곳에 백제와 관련한 유물이 있기 때문에 열지 않는 것 아니냐는 뉘앙스였지만, 이건 냉정하게 말해서 '역사적 팩트'가 아니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혹'이었습니다. 다 접어두더라도 총리가 공식석상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죠. 한 기자가 "일본에 대한 메시지도 될 텐데,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박인가"라고 묻자, "직접적 반박이라기보다는 정황 설명을 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런 의혹 제기는 국회에서라면 몰라도 상대가 있는 외교 사안에서는 섣불리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실익은 없이 일본인들의 정서만 자극할 수 있고, 일본 정부가 "근거가 있느냐"고 정색하고 반박할 경우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 "청와대와 조율 없었다"…주먹구구 대응 노출
일본교과서 캡쳐_6
더 큰 문제는 대일 메시지는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전달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 내 조율 없이 이런 간담회가 나왔다는 겁니다. 같은 날 외교부는 대변인 정례브리핑에서 "임나일본부설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일본 학계에서도 통설인 것으로 안다. 관계기관의 구체적 분석을 거쳐 문제 제기를 재차하고, 관련 기술의 시정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즉, 관계기관의 구체적 분석을 거쳐 제대로 문제제기를 하겠다는 게 정부 공식 입장인 겁니다. 하지만 총리는 이런 분석 결과조차 나오기 전에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한 기자가 "이런 내용으로 간담회를 한다는 것을 청와대와 조율하셨느냐"고 묻자 이 총리는  "조율은 없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날 총리의 발언에는 일본 교과서 도발의 핵심인 독도 문제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빠져 있었습니다. 총리가 일본을 엄하게 꾸짖으면서 얘기한 사자성어 '지록위마' 역시, 윤병세 장관이 이미 했던 얘기를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총리의 격에 맞는 형식과 내용을 갖춰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총리의 간담회는 시기나 내용, 절차 그 모든 측면에서 부적절한 주먹구구의 전형을 보여줬습니다.

● '조용한 외교'보다 주먹구구 대응이 더 문제

최근 대일외교에 있어서 '조용한 외교'가 한계에 부닥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이 도발할 때마다 우리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하고, 성명을 발표하는 걸 반복하는 사이, 일본은 점점 더 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대응이 반드시 잘못됐다고 말하긴 힘듭니다. 예를 들어, 독도 문제를 국제분쟁화 시켜서 얻을 게 있는지는 분명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또 일본이 안보와 경제 측면에서 협력해야만 하는 이웃국가라는 점도 '국익' 차원에서 보자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용한 외교'는 딜레마입니다. 적어도 '조용한 외교'는 우리 외교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답안 중 하나이고, 논의의 대상은 됩니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일본 도발에 대해 일관되게, 치밀하게 대응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제가 볼 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난해 11월 독도입도지원 시설 건립 문제로 정부 내 혼선이 드러나 이 총리의 전임자였던 정홍원 전 총리가 사과했던 게 엊그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총리는 또 조율도 없이 기자 간담회를 열어 정제되지 않은 얘기만 늘어놓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총리의 간담회를 어떻게 봤을까요? 2000년대 들어 십년 이상 치밀하게 영토, 과거사 문제를 접근하는 일본 정부와, 당일 아침 조율도 없이 기자 간담회를 여는 우리 정부. 조용하건 시끄럽건, 치밀하게 '준비된 외교'가 필요한 엄중한 시국입니다. 준비된 외교가 제대로 발현되려면, 사드의 한반도 배치와 일본 도발 대응을 포함한 외교 문제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시도부터 싹을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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