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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28년 전으로 시계 되돌린 박상옥 청문회

[취재파일] 28년 전으로 시계 되돌린 박상옥 청문회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요청서가 국회 도착한 지 72일만인 7일 박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청문회의 시계는 28년 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상 1987년 벌어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청문회나 다름 없었습니다. 청문회 단골 메뉴로 등장했던 위장 전입과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같은 의혹은 전혀 거론되지 않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수사가 제대로 진행됐는지, 당시 수사 검사였던 박 후보자가 제 역할을 했는지 등에 의원들의 추궁이 집중됐습니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 군은 1987년 1월 14일 아침 서울 신림동 하숙집에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 경찰관들에게 연행됐습니다. 서울대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 씨의 행방을 찾기 위해 후배인 박 군을 취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박종철 군은 박 씨의 행방을 알지 못했고, 경찰의 물고문이 시작됐습니다. 욕조에 머리가 처박힌 채 고문을 당하던 박 군은 목 부위가 욕조 턱에 걸려 질식사했습니다. 연행된 지 채 몇 시간 되지도 않은 오전 중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월 15일 중앙일보가 박 군의 사망 사실을 처음 보도했고, 그날 저녁 경찰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박 군을 조사하다가 "책상을 탁 치니 박 군이 억 하고 쓰러지며 죽었다"는 희대의 거짓말(박처원 당시 치안감)이 이 때 나왔습니다. 비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검찰 수사 결과 대공분실의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가 고문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기소(87년 1월 24일)됐습니다.

하지만 약 넉달 뒤 이들 외에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들이 더 있다는 사실이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87년 5월 18일 사제단 김승훈 신부의 폭로로 기소된 두 경찰관 외에 경찰관 3명이 고문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졌고, 검찰은 2차 수사에 착수해 3명의 고문 경찰을 추가 구속기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88년 1월에는 경찰의 최고위 간부들의 사건 조작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강민창 치안본부장 등 경찰 고위 간부들이 추가로 구속됐습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이 사건에서 고문 경찰관 2명과 이어 3명을 추가 기소하는 과정에 수사 검사로 참여했습니다. 신창언 형사2부장과, 안상수 검사에 이어 막내 검사였지만 1차 검사에서 강진규 경사 조사를 담당하고, 2차 조사 때 황정웅, 반금곤을 조사하는 등 적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 청문위원들은 박 후보자가 대법관이 되기에 부적합한 이유를 몇 가지 들고 있습니다. 우선 박 후보자가 검사로서,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능동적으로 임하지 않고, 외부의 폭로에 의해 그 때 그 때 떠밀리듯 수사했다고 비판합니다.

최초 1차 수사에서 고문 경관 2명을 구속하면서 공범이 있는 걸 밝혀내지 못했고, 5월 사제단의 폭로로 뒤늦게 수사에 착수한 걸 문제 삼고 있습니다. (야당은 검찰이 강민창 치안본부장 등 경찰 윗선의 축소 조작 사실을 88년에 가서야 뒤늦게 수사한 것도 문제 삼고 있습니다. 2차 수사 이후 수사 주체가 대검 중수부로 바뀌어 박상옥 후보자는 3차 수사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차 수사 당시 고문 경찰관 2명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현장 검증을 피의자도 대동하지 않은 채 조사하는 것 같은 형식적인 수사 방식도 문제 삼았습니다.

특히 당시 영등포 교소도에 수감돼 있으면서 추가 가담자 의혹을 외부에 제보한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조한규 강진경 씨가 죄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데 그 정황이 수사팀에 전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며 검찰이 추가 가담자의 존재 사실을 알고도 적극 대처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했습니다.

반면 새누리당은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은 경찰이 심장마비로 은폐하려던 것을 검찰이 끈질기게 수사해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라는 것을 밝혀낸 게 본질이라며 이 부분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사건 초기 경찰이 박종철 군의 시신을 화장하려던 것을 제지하고, 부검 장소를 경찰대 병원에서 중앙대 용산 병원으로 바꿨으며, 부검에 경찰을 입회시키지 않고 철수시킨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김회선 의원)

수사 검사로 1, 2차 수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안상수 창원시장은 "당시는 안기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때였다"며 "무엇이든 자유스럽게(자유롭게) 수사할 수 있는 지금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5공화국 말기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는 전 국민적인 저항이 시작됐습니다. 같은 해 6월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군 사건까지 겹치면서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번졌고,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한 청년의 억울한 죽음을 수사했던 검사가 28년 뒤 법조계 원로가 돼 대법관 후보자로서 인사청문회장에 섰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건 수사 과정을 둘러싸고 해석과 평가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28년 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기폭제 역할을 하며 산화한 이 청년이 오늘의 이 시국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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