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를 먼저 보고, 뒤늦게 김훈 작가의 소설 '화장'을 찾아 읽었습니다. 큰 줄거리는 대기업의 50대 임원이 암환자인 아내와 매력적인 여직원 사이에서 고뇌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을 이런 싸구려 문장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훨씬 묵직하고 심오한 작품입니다. 특히 소설 '화장'은 표현이나 어휘도 문학적인데다가, 서술 구조 자체가 일반 소설과 달랐습니다. 그만큼 영화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 제작자에게 소설 원작은 늘 매력적인 소재이지만, 실제 영화로 만드는 일은 많은 리스크가 따릅니다. 원작과 비교되기 때문이죠. 화장이 10년만에야 영화화된 것도 그동안 자신있게 영화로 만들어낼 제작자나 감독, 배우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작사인 명필름이 임권택 감독에게 연출을 부탁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정도 경험만으로 직접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고 극장 상영까지 이끌어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송 감독은 '하얀 정글' 이후 좀 더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등록합니다.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었던 송 감독은 소설 '화장'에 나오는 암 환자 아내에 주목했습니다. 산업의학과 전문의로서 환자 이야기를 좀 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송 감독의 시나리오를 본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전격적으로 영화화를 결정합니다. 이후 시나리오를 좀 더 손 본 각색가는 육상효 감독입니다. 육 감독은 '달마야, 서울 가자'(2004), '방가?방가!'(2010) 등을 연출했습니다.
당연히 소설과 시나리오에는 비슷한 대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위쪽이 소설, 아랫쪽이 시나리오입니다.
영화 촬영은 현장에서 시나리오와 콘티북을 함께 참고하면서 이뤄집니다. 하지만, 콘티북에도 배우들의 표정 연기나 몸의 움직임, 목소리 톤, 동선 등이 자세히 적혀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배우의 진짜 연기, 감독의 진짜 연출이 더해지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해당 영화의 진정한 분위기와 색깔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영화 '화장'에 임권택 감독의 연륜이 배어나온다고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임 감독은 현장에서 많은 장면을 바꾸고, 시나리오를 쓴 송윤희 감독도 현장에 나와 임 감독과 많은 의견을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메이킹(making)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임 감독(왼쪽)과 송 감독(오른쪽)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2) 서로 대화를 나누는 배우 김호정 씨와 임 감독 사이 책상 위에 '시나리오'가 놓여있군요.
영화 '화장'. 액션 스릴러 사극 중심의 오락 영화가 장악하고 있는 우리 영화계에 이런 정통 극영화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신 임권택 감독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