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환자 상태 모르는 의사가 '대리처방'이라니…

[취재파일] 환자 상태 모르는 의사가 '대리처방'이라니…
‘대리처방’이라는 게 있습니다. 정말 처방이 필요한 사람을 대신해 다른 사람이 의사를 만나 처방전을 받는 것을 이릅니다. 거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이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하는 질병까지 앓는 경우를 떠올리면 됩니다. 의사와 환자의 대면 진찰을 원칙으로 하는 의료법 상으로는 불법입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 고시(제2013-192호)에는 대리인이 대신 처방을 받아가도 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환자 가족이 처방전을 받거나 약을 타 가면 병원은 진찰비의 50%만 받으라는 지침이 그것입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고민한 의사들이 보건복지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했고, 보건복지부는 행정해석을 통해 엄격한 요건 아래 제한적으로 대리처방을 허용하게 됐습니다.

● 환자 편의 위해 제한적 대리처방 허용

아무나 대리처방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선 대리처방을 받아가는 보호자의 범위를 제한합니다. 환자의 배우자와 직계 혈족, 그 혈족의 배우자, 환자의 형제자매와 배우자의 직계혈족, 환자 배우자의 형제자매 등 적어도 우리가 친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만 보호자로서 대리처방이 가능합니다.

사유도 제한합니다. 환자가 재진을 받는 경우여야 하고, 이때도 같은 질병에 대한 재진이어야 합니다. 한 질병에 장기간 같은 의약품을 처방해 왔는데 이 약을 또다시 처방할 경우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환자 본인의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여야 합니다. 이 요건을 충족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주치의가 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주치의가 집니다. (책임이 의사에게 있기 때문에 의사협회는 지체장애 증빙 서류 등을 지참한 보호자에게만 대리처방을 하도록 회원들에게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대리처방을 “오로지 환자 편의를 위해, 의약품 사용 안전성이 담보된 선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제도”라고 설명했습니다. “의사가 자기 환자를 계속 본다는 개념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고도 덧붙였습니다.

● 환자 상태도 모르는 의사가 돌아가며 대리처방

그런데 대리처방이 남발돼 문제가 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2일(목) <SBS8뉴스>와 3일(금) <모닝와이드>를 통해 보도한 80살 박 모 씨 이야기입니다. (▶ "약만 타가라" 환자 상태 안 보고 '대리처방' 남발)

박 씨는 7년 전 뇌경색 진단을 받고 한 종합병원을 찾았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뇌혈관 질환 전문병원’이었습니다. 이 병원 의사들은 환자인 박 씨 대신 가족을 불러 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지난해 말, 박 씨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진단명은 ‘급성 뇌경색’, 당장 입원해야 했습니다. 박 씨는 이제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거동조차 어려울만큼 악화됐습니다. 가족들은 해당 병원의 책임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병원에서 7년 동안 대리처방을 하며 환자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병을 키운 거라는 얘기입니다. 

2010년 이후 확인 가능한 박 씨의 진료기록을 봤습니다. 50번의 진찰 가운데 21건이 보호자만 병원에 가 대리 처방을 받은 경우였습니다. 길게는 반년동안 진찰 없이 대리처방만 받기도 했는데, 심지어 처방한 의사는 제각각입니다. 박 씨 주치의가 아닌 의사들도 처방한 것이지요.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은 의사들이 진료기록만 보고 처방을 내준 겁니다. 의료법 위반입니다. 기자가 해당 병원에 가봤더니 주치의 아닌 의사로부터 처방전만 받아가는 보호자들이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의사_640
병원 측은 진료 예약 시간을 지키지 않고 찾아오는 보호자가 종종 있는 탓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경우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다른 전문의가 처방전을 내주기도 했다는 겁니다. 박 씨의 경우엔 “여러 차례 환자 본인이 내원하도록 권유했었다”며, “보호자들과 싸워서라도 환자를 병원에 데려오게 해 진료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한 건 잘못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병원은 대리처방의 경우 진찰비의 50%만 받아야 하지만 100%를 다 받은 경우도 여러 건 확인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조사를 받을 예정입니다.

● 환자가 원하면 다 들어줘야 하나

일부 병원과 의사가 법을 어겨가며 대리처방을 남발하는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환자 유치 효과를 포기하기 어려운 겁니다. 박 씨를 진료했던 병원 관계자는 대리처방 남발이 “다른 병원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관행”이며 “환자들이 원하면 거부할 수가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가버린다”는 건데, 환자를 돈으로 보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합니다.

실제 복지부에는 장기간 중증질환에 시달리는 가족을 둔 사람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습니다. 대리처방 요건이 왜 이렇게 엄격하냐는 거죠. 전문 간병인이 처방받아도 좋을 것을, 생업 가진 사람들이 약 한번 타겠다고 꼬박꼬박 병원을 찾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쉽게 대리처방을 내주는 곳으로 병원을 옮겨 다니는 것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죠.

그런데 의사란 직업이 원래 생명을 살리고 건강을 돌보는 직업이지요. 환자가 아무리 원한다 한들 환자 상태도 모르는 의사가 대리처방을 한다는 건, 일어나선 안 되는 일입니다. 환자 편의보다 중요한 게 환자의 건강입니다. 법을 지켜가며 엄격하게 마구잡이 대리처방을 해주지 않는 병원이 있고, 이게 불만이어서 병원을 떠나는 환자라면, 그 자체로 잘 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환자를 돈으로 보는 의사와 병원보다는 내 상태를 직접 보고 내 건강을 챙겨주는 병원과 의사를 만나는 게 더 나은 일 아닐까요.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