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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권노갑과 정동영, 그리고 천정배

돌고 도는 정치판의 인연

[취재파일] 권노갑과 정동영, 그리고 천정배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올해 나이가 85살입니다. 목포상고 재학중 4년 선배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김 전 대통령계를 일컫는 동교동의 2인자 소리보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저한테 말했습니다.

그런데 13대~15대까지 3선 의원을 지낸 권 고문은 그토록 소망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 이후에는 아무런 공개직책을 갖지 못했습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각종 게이트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단 한 번 예외가 2000년 8월 당시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전당대회 이후 지명직 최고위원이 됐을 때입니다.그러나 그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전당대회 순위는 아마도 한화갑, 이인제, 김중권, 박상천, 정동영, 김민석, 추미애 순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면 그것도 재미있습니다.)

그해 1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 최고위원의 만찬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출국하기 직전이었죠. 이 자리에서 마지막 발언자로 나선 당시 재선의 정동영 최고위원은 우리 정당사에 기록될 도발적이며 직설적인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시중에는 권노갑 최고위원이 부통령이니 김현철이니 하는 말이 돌고 있다. 공기업 인사를 비롯해 당정 인사에 개입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 당이 시스템이 아닌 대통령 측근 몇몇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권 최고위원이 2선으로 물러나 면모를 일신하는 것이 좋겠다." 김대중 대통령도, 권노갑 최고위원도 눈을 감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정동영 최고위원의 발언 내용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지만, 발없는 말은 하룬가 이틀 만에 기자들에게 옮겨졌고, 그 이후 정동영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한 바른정치모임 소속 의원들(신기남, 천정배…)은 일약 정풍, 새정치의 기수로 떠올랐습니다. 권노갑 최고위원은 "대통령과 당을 위해서 물러나겠다."는 順命이라는 말 한마디로 2선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로부터 1년쯤 뒤에 김근태 의원이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고 나서자, 물러나 있던 권노갑 고문은 "동교동계는 민주당의 뿌리이자 역사"라고 발끈하기도 했습니다. 김근태 의원은 일년 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사실 2000년 8월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으로부터 2천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공개하며 또다시 권노갑 고문을 구석으로 몰기도 했습니다.다만, 김근태 의원은 천신정으로 불리는 정풍파와는 궤를 달리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벌써 10년이 넘게 지난 일이지만, 당시 천신정으로 대변되는 정풍파는 새로운 정치의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권노갑 고문으로 대표되는 동교동계는 청산돼야 할 낡고 음습한 구정치가 돼버렸죠. 재미있는 것은 정풍파 대부분이 15대 선거 때 권 고문에 의해 추천되고 권 고문을 통해 재정적 지원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는 점입니다. 권 고문은 사실상 자기 손으로 뱃지를 달아준 사람들에 의해 가지치기를 당한 셈이죠. 김대중 정권 내내 무슨 일만 터지면 조용히 움직이던 권 고문의 행적을 찾아 종일 헤매고 다녔던 일도 기억납니다.
정동영 전 의원 캡

그리고 10여 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통일부장관에 이어 민주당의 뿌리를 이어받은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까지 지냈습니다. 천정배 전 의원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신기남 의원은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냈습니다. 권 고문은 물러난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사이 천신정은 민주당과 갈라서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2007년 대선 이후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지금 천신정 가운데 신기남 의원을 제외한 두 사람은 다시 당을 떠나 무소속 신세입니다.

새정치의 희망을 얘기하던 두 사람은 여전히 새정치를 얘기하고 있습니다만 메아리는 예전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민주당에 있는 권 고문은 이제 두 사람을 향해 "정말 나쁜 사람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4월 재보선을 앞두고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것도 모자라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들을 향해 비수를 겨누고 있다는 게 권노갑 고문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권 고문은 이번 재보선 기간 정동영 전 의원이 나선 서울 관악을은 물론 천정배 전 의원이 출마한 광주 서을지역을 찾아가 새정치연합 후보를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15년 전 청와대에서 당한 인간적 모멸감을 갚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제 1야당을 지키기 위한 행보라는 게 권노갑 고문 측의 설명입니다. 다만, 지켜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15년 전 청와대의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수가 역전된 2015년의 봄, 팔순을 훌쩍 넘긴 노정객과 한 때 푸르른 새정치의 희망을 국민에게 안겨줬던 육순의 정치인 두 명의 공방이 이번 재보선을 뜨겁게 달굴 듯 합니다. 권노갑 고문이 2선으로 물러날 그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누가 이 리턴매치에서 이길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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