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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울고불고할 것 없다, 다만 먹먹할 뿐…연극 '3월의 눈'

좋아하는 외국곡 중에 ‘나고리유키’라는 일본 노래가 있습니다. ‘잔설’로 많이 번역되던데, 가사를 보면 겨울이 지나 내리는 때늦은 눈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래 전 아이코와 키로로라는 두 여가수의 두엣 곡으로 처음 접하고 좋아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오늘 얘기하는 연극 ‘3월의 눈’도 제목의 의미만 놓고 보면 일본 노래 ‘나고리유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등장인물은 전혀 다릅니다. 일본 노래는 성년이 되면서 유년 혹은 소년(소녀) 시절의 인연과 이별을 겪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지만, 연극 ‘3월의 눈’의 두 주인공은 인생의 황혼기에 선 80대 노부부 ‘장오’와 ‘이순’입니다.  
[취재파일 ]곽상은
 
‘장오’는 터덜터덜 걷고 느릿느릿 움직이며 말수가 많지 않은 노인입니다. 무뚝뚝하고 불쑥 성을 내며 혼자 꾸벅꾸벅 졸기도 하는, 매사 의욕이 없어 보이는 할아버지입니다. 그에 비해 아내 ‘이순’은 보기 드물게 사랑스러운 할머니입니다. 남편에게 부탁을 할 때는 두드러지게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남편이 성을 내자 뒤에서 목을 감싸 안고 달래기도 합니다. 덜렁댄다고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종일 뜨개질로 남편의 옷을 만들고 남편 옆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두 사람의 공간에 활기를 불어 넣습니다.
 
별스러울 것 없는 이 노부부의 일상은 그들이 손자의 빚 감당을 위해 오랜 세월 살아온 정든 한옥집을 팔고 떠나기로 하면서 하나하나 조금씩은 별스럽게 다가옵니다. 손님이 없어 문을 닫게 된 오래된 이웃의 이발관 이야기며, 나무들이 다 죽고 보기 흉해졌다고 동네에서 치워버린 노부부의 화분들, 누군가의 테이블을 만들기 위해 인부들이 뜯어낸 이 집의 대청마루까지 모두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잔잔하고 고요한 노부부의 일상은 곧 버스러질 것 같은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취재파일 ]곽상은
 
노부부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들의 지난 삶에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하나뿐인 아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이순’이 추억하길, 그 아들은 도망 중에도 어느 날 불쑥 새벽녘 집에 들러 ‘어머니 미끄러질까 무섭다’며 3월에 내린 그래서 곧 녹아 없어질 눈을 저 골목 앞까지 쓸어놓고 가는 정 많은 자식이었습니다. 안에서 내다보지도 않는 아버지이지만 안방에 대고 절을 하고 길을 나서는 그런 살가운 자식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사라진 뒤 30년 세월 부부는 마음 속에 깊은 한을 담고 살아왔을 겁니다. 그래서 이 노부부의 고요한 일상은 마치 살얼음 아래 거대한 강물이 흐르듯, 고요한 표면 아래 거대한 슬픔이 흐르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극의 후반부에 ‘장오’는 ‘이순’을 향해 말합니다. “섭섭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어. 빈 손으로 혼자 내려와서 자네도 만나고 손주, 증손주까지 보았으니, 이만하면 괜찮지, 괜찮고 말고. 이젠 집을 비워 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여긴 이제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객석에서 하나둘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장오'가 하는 이 말은 그래서 관객들을 달래고 나즈막이 당부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만하면 됐다. 괜찮지, 괜찮고 말고. 마지막 가는 길에 울고불고할 것 없다...'라고 말이죠.

3월의 눈은 한겨울 눈과 달리 쌓이지 않고 땅에 닿자마자 사라져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땅은 조금 젖을 뿐, 눈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눈 녹듯 사라지고 마는 거죠. 연극은 이 눈이 땅에 닿는 바로 그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취재파일 ]곽상은
 
다시 ‘나고리유키’란 일본 노래 얘기를 잠깐 덧붙이자면, 이 노래는 이제 끝나가는 청소년기에 대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더 화려한 청춘의 날이 펼쳐질 것을 알고 있는 20살에게도 돌아오지 않는 지난 시간에 대한 아련함은 남는 법인데, 하물며 인생을 마무리하는 80대 노인의 심정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마을 통장이 뜯겨져 나가는 노부부의 한옥집을 보며 안타까워하면서 하는 말처럼, ‘허망하게’ 사라져가는 삶과 그 외 많은 것들에 대해 먹먹함을 안겨 주는 작품입니다.
[취재파일 ]곽상은
 
2011년 3월 초연된 이 작품은 올해도 어김 없이 3월을 맞아 원로배우의 명품연기를 통해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연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 추천하는 글을 남기는 게 무슨 쓸모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이 극은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언제든 다시 공연될 것 같아 뒤늦은 글쓰기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관람을 권하는 이 글의 마지막은 마치 시의 한 구절 같은, 배삼식 작가의 희곡 마지막 지문으로 갈음합니다.
 
뜯겨져 나가는 집이 애처롭게 앓는 소리를 낸다.
분주한 소란의 와중에, 외떨어진 섬처럼,
이순은 툇마루에 앉아, 황 씨는 마당에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삼월.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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