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

경숙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조금 다른 시선

[취재파일]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
전쟁이 터졌단다. 천둥소리만큼 크고 무서운 소리가 난다. ‘이제 진짜 죽는갑다’ 싶어 짐을 쌀라카는데 아베가 나한테 너거 어메하고 집을 지키라 카신다. “전쟁 끝날 때까지는 각자 알아서 살아 남는기다. 알긋제?” 하면서 아베는 저 멀리 가셨다…
 
어찌 어찌 삼 년이 지나고 아베가 살아 돌아왔다. 수용소 동지라나…꺽꺽이 삼촌을 델꼬 왔다. 하지만 아베는 또 어메랑 나를 놔두고 떠났다. 꿈을 펼칠라꼬 간다나 어쩐다나…나는 울 아베가 싫다. 아베 얼굴도 가물가물한 게 완전히 이자뿟으면 좋겠다…
 
클났다. 아베도 없는데 어메 뱃속에 아가 생겨뿌딴다. 꺽꺽이 삼촌 때문이란다. 아베가 집에 왔다가 이 사실을 알고 집을 또 나가뿟다. 이번에는 돈가방까지 챙겨가지고 갔다. 꺽꺽이 삼촌이 도저히 못 산다고 떠나자고 해서 새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근데 아베가 우예 알았는지 새 집에 찾아왔다! 자야라 카는 새어메까지 델꼬! 이제 우짜면 좋노!

[취재파일] 곽상은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
의 프로그램 북에 ‘경숙이의 일기’란 이름으로 실린 극 초반 줄거리입니다. 사투리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글이라 철자가 올바르지 않지만, 그대로 한 번 옮겨보았습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극의 흐름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연극 경숙이

위의 짧은 글만 봐도 경숙이 아버지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실 겁니다.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서만 살겠다고 피난을 떠나는 아버지라니…축첩하고 한량으로 방탕하게 지내는 아버지 상은 우리 근대소설에서 드물지 않은 캐릭터이긴 합니다만, 같이 피난 가겠다는 아내와 어린 딸을 굳이 떼어내고 혼자만 달아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해도 너무하다 싶습니다. 경숙이 아버지는 그런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극을 보는 내내 가슴을 가장 짠하게 만드는 인물은 경숙이도, 경숙이 어머니도 아닌,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고뭉치인 경숙이 아버지란 인물이었습니다.
 
경숙이 아버지에게 그토록 쉽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건 외형적으로 보자면 경숙이 아버지가 이 가정에서 가장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긴 생머리를 한 청순하고 병약한 10대 소녀나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교회 오빠 같은 전형적인 인물은 주인공이 감정을 품는 대상은 될지언정 내가 감정을 이입하는 인물이 되기는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경숙이 아버지가 보여주는 예측불허의 돌발성이 오히려 그를 이해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염치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경숙이 아버지에게서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무거운 관계의 이름들을 걷어내고 나면 그 안의 나약하고 미성숙한 한 인간의 본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취재파일] 곽상은

경숙이 아버지의 꿈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전재산인 소 한 마리를 귀한 아들에게 내어주며 꿈을 좇아 가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아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우리 집 전 재산은 바로 너’라며 하나뿐인 아들의 가출을 독려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장단이 있다. 너도 네 인생의 장단을 두들겨라!’라며 말이죠.
 
장구를 멘 채 아버지의 군화를 신고 집을 떠나온 아들은 세월이 흘러 자신도 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돌아온 집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발견한 뒤 딸의 방에 들어와서는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합니다. ‘나무는 사람처럼 복잡하지 않다. 지 자리고 싶은 대로 자라도 크면 다 멋있다. 그게 나무다.’라고요.
 
나무처럼 지 멋대로 멋있게 살고 싶었던 이 남자는 그러나 자신의 현실이 그런 꿈과는 너무나 괴리돼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이고, 깝깝한 년’, ‘삶은 모진기다’라고 경숙이 아버지가 딸에게 몇 번이나 내뱉는 이 말은 그래서 어린 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결국은 한숨과 자기혐오로 귀결되는 스스로의 삶을 암시하는 듯한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부지불식간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취재파일] 곽상은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주는 수작입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분명히 알고 있는 듯한 박근형 작·연출가의 능력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배우들의 연기 또한 하나같이 천연덕스럽고 맛깔스럽습니다. 전형적인 아버지 상을 보여주며 이해가 결여된 감사와 눈물을 강요하지 않아 더욱 좋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버지를, 어머니를,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고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연극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