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월드리포트] 초원과 공생 잊은 현대의 야만인들

[월드리포트] 초원과 공생 잊은 현대의 야만인들

네이멍구 초원
초원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유목민들이 양떼를 이끌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문명의 그늘쯤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직접 가서 본 초원의 환경은 살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강수량이 워낙 적어 나무조차 자라기 힘든 곳이 태반입니다. 농사는 꿈도 못 꿉니다. 계절은 딱 두 개입니다. 여름과 겨울. 여름에는 40도 넘는 뙤약볕이 내리 쬐고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칼바람이 휘몰아칩니다. 왜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 사람이 살고 있을까 의아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초원의 유목민들은 나름의 문화를 훌륭히 가꿔왔습니다. 수천 년을 초원의 환경에 적응해 살아왔습니다. 그냥 적응해 목숨만 이어간 것이 아닙니다. 종종 세계사를 주도했습니다. 서로마의 멸망을 이끈 것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입니다만 그 게르만족을 살던 곳에서 쫓아낸 사람들은 초원지역에서 온 훈족입니다.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라고 자랑하는 중국도 한 무제 이전까지는 초원 지역에 비해 군사적으로 열세였습니다. 이들의 침입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이라는 어이없는 건축물을 세워야 했습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은 통일 후 야심차게 흉노족을 공격했다가 하마터면 수십만 대군과 함께 전멸당할 뻔 했습니다. 이간계를 써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후 지속적으로 흉노족에 공물을 바쳐 평화를 구걸해야 했습니다.

칭기즈칸은 전무후무한 세계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중국 사상 최초로 이민족으로서 중국 전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서방에서 가장 유명한 동양인은 칭기즈칸일 것입니다.

네이멍구 초원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이 취약한 초원의 환경 속에서 이렇게 강대한 세력을 유지해온 비결이 무엇일까요? 지속가능한 생산을 위해 특별한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환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왔습니다.

네이멍구 초원 문화에 정통한 한 환경보호 활동가의 설명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목민들은 5종류의 가축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비율대로 사육해왔습니다. 소와 양, 말과 당나귀, 그리고 낙타입니다. 물론 양이 가장 많지만 다른 동물도 조금씩이라도 꼭 길렀습니다. 이들 5종 동물은 좋아하고 잘 먹는 풀이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어떤 풀만 집중적으로 먹어버려 식생의 균형을 깨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낙타는 혓바닥이 튼튼해 가시가 있는 골담초와 같은 풀도 잘 먹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양이나 소만 집중적으로 키우다보니 이런 균형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양들이 좋아하는 풀은 뿌리까지 파먹어 없어지는 대신 낙타들이 먹어 없애주던 골담초는 점점 번져나가는 것이죠. 인간이 더욱 상업적으로 굴수록 초원에서 지속가능한 생산을 하기 힘들어지는 셈입니다."

네이멍구 초원
네이멍구에서 만난 몽골 소수민족 출신 목축인의 하소연입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땅에 대한 소유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 모두 함께 공유하는 존재였죠. 내 땅이 아니라서 함부로 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내 이웃에게서, 우리 후손에게서 빌려 쓰는 땅이라 여기고 더욱 소중히 여겼습니다.

한 지역에서 양을 방목하다가 풀이 고갈되기 전에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어차피 초원을 가다보면 좋은 초지를 만날 수 있으니까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중국 정부가 주민 관리를 위해, 재산권 정리를 위해 땅을 모두 조각조각 냈습니다. 울타리를 치고 내 소유의 땅에서만 목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물론 현명한 목축인이라면 땅을 훼손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죠. 하지만 게으르거나 욕심 많은 목축인들은 초지를 망쳐놓는 경우가 왕왕 발생합니다. 사실 유목을 하지 않으면 땅을 훼손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갑자기 가물어 풀이 많이 나지 않는다고 기르던 양의 수를 줄이겠습니까? 과거 같으면 다른 곳으로 떠날 텐데 그 자리에서 초지가 복구 불가능할 만큼 망가지더라도 그저 눈앞의 이익만 쫓습니다."


네이멍구 초원

실제 현재 초원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과거와 같이 다양한 풀이 조화를 이룬 초원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현지 목축인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아니 더 큰 잘못은 정부와 기업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하자원을 개발하겠다고, 공장을 운영한다고, 위락시설을 유지한다고, 도시를 건설한다고 지하수를 마구 뽑아 쓰고 있습니다.
초원에서 지하수는 핏줄과 같습니다. 설사 비가 오지 않아도 지표면에 수분을 공급해 풀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지하수를 남용하다보니 지표면이 바짝 말라버리고 마치 원형 탈모가 생기듯이 불모지대가 곳곳에서 번져가고 있습니다.

초원에서 생활하던 유목민들이 수천 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오히려 강대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살던 공간을 단 수십 년 만에 못쓰게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전성기를 이뤘다고 자랑하는 현대인들이 초원에서는 반달족 같은 야만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초원의 유목민들이 알려준 팁 한 가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네이멍구는 황사의 발원지죠. 그러니 황사의 규모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합니다. 모래 폭풍이라도 불면 집안에 모래 먼지가 가득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황사를 이런 방법으로 막아내고 있다고 합니다.

"아궁이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고 최대한 많을 물을 끓여 수증기를 만듭니다. 집안이 수증기로 가득해질 만큼 말이죠. 그러면 공기의 밀도가 달라져 모래 먼지가 단 한 톨도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집을 모두 빗겨 가버립니다."

대단하죠? 다음에 황사가 오면 꼭 시험해볼 생각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