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이 '국제 망신'인 또 다른 이유

리퍼트 피습 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은….

[취재파일]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이 '국제 망신'인 또 다른 이유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가 지난 10일 퇴원했습니다. 아직 완쾌되진 않았지만, 리퍼트 대사의 건강은 예전 수준을 거의 되찾은 듯 보였습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은 일단락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전직 외교장관을 포함한 많은 외교가 인사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국제 망신'이라는 공통된 반응을 내놨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해외 외교사절이 공격을 받아 다친 이번 사건은 말 그대로 초유의 일이었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만 되돌아보면 이번 일이 '국제 망신'이라는 게 꼭 사건 자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정치권이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역순으로 되짚어보겠습니다.

● <3월 8일> 여야 대표의 위문 아닌 위문
문재인 김무성 리퍼
문재인 김무성 리퍼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사실 가장 망신스러웠던 장면은 김무성, 문재인 여야 대표가 리퍼트 대사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지난 8일, 두 대표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위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쏟아내며 이른바 '종북 숙주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먼저 시동을 건 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였습니다.
"종북 좌파들이 한미동맹을 깨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한미 관계를 더 결속시키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방문한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도 맞받아쳤습니다.  
"종북 세력에 의한 것이라며 국내 정치에 악용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한미 양국관계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낯이 뜨거웠습니다. 다른 나라 대사의 병문안을 온 자리에서 두 대표는 우리 정치의 민낯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 보였습니다. 위문을 왔으면 "어서 쾌차하라"고 전하고 돌아가면 될 일을 정쟁의 기회로 삼은 겁니다. 위문 와서도 싸움을 멈추지 못할 정도로 한국 정치가 갈갈이 찢겨 있구나, 만만하다 못해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인상을 주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 장면을 보고 너무 부끄러워 절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진짜 '국제망신'이었습니다.

● <3월 6일> 수사도 없이 조직 범죄로 규정
당정청 회의

이런 '국제 망신'은 어디로 비롯됐을까? 사건 발생 이튿날인 6일 정부와 청와대, 새누리당은 고위 당·정·청 회의를 열고 이번 사건을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저지른 사건으로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김기종 개인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조직 범죄'라고 단정한 겁니다.

같은 날 새벽 시작된 김기종 씨의 사무실 압수수색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였습니다. 수사기관이 '조직 범죄'를 입증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입니다. 수사의 초입 단계에서 당정청은 어떻게 이 범행의 성격을 조직 범죄라고 단정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결론을 내리라고 수사의 방향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시스템이 굴러가는 '정상 국가'라면 이 단계에서는 "철저한 수사를 당부"하는 수준에서 입장이 나왔어야 합니다. 수사결과 배후 세력이 특정된다면, 그때 해당 세력을 처벌하고, 정치적인 공방을 벌여도 늦지 않았을 겁니다.

● <3월 5일>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과연?
주철기

사건 당일, 중동 순방중이었던 박근혜 대통령과 외교장관, 청와대 당국자들은 새벽 시간에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을 통해 이번 사건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오늘 리퍼트 대사의 피습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번 사건은 주한 미대사에 대한 신체적 공격일 뿐만아니라 한미 동맹에 대한 공격으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이때부터 과잉 대응한다는 인상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란 보기에 따라 엄청난 발언일 수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조직적인 테러로 규정한다는 것이고, 향후 뿌리 뽑아야 할 세력이 있다는 것이고, 미국에도 국내에 이런 반정부 조직이 있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당사국인 미국 정부나 언론의 입장을 보면, 우리 정부가 얼마나 과잉 대응했는지 잘 드러납니다. 미국 측은 테러라는 용어 대신 공격이나 폭력행위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했습니다.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대변인은 "끔찍한 폭력 행위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범행 동기나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번 일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당시 청와대 반응은 너무 앞서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땐 새벽 시간대에 너무 긴박하게 회의를 하다보니 다소 어설픈 입장이 나왔나보다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전개되는 사태를 보면 단순한 오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피습 사건 전후 어떤 일 있었나?
그래픽_셔먼미정부

정부와 여당의 과잉 대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피습 사건 이전의 상황을 한 번 되돌아보겠습니다.

우선, 외교적으로는 '웬디 셔먼 차관 발언'이 있었습니다. 셔먼 차관은 한 강연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을 편드는 듯한 발언을 해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사안에 대해 공동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 피해자로서는 분노할 수 있는 것이죠. 이 발언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일시적으로 좋지 않은 대미 여론이 형성됐던 게 사실입니다.

또 미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즉 사드 도입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미국 당국자들은 "한국과 사드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면서 치고 빠지는 행보를 보여왔고, 중국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해왔습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나라는 "미국과 사드 도입 논의한 적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현 정부 지지율도 연말정산 파동과 각종 인사 청문회 후유증으로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의 공격을 막지 못했던 우리 경호의 문제가 부각됐다면, 그 화살은 경찰과 정부로 돌아갔을 상황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좀더 두고 볼 일이지만, 리퍼트 피습 사건 이후엔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셔먼 차관 발언 논란은 쏙 들어갔고, 여당은 사드 도입을 위한 군불떼기에 나섰습니다. 한때 30%까지 떨어졌던 대통령 지지율은 39%까지 올랐고, 리퍼트를 공격한 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종북세력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 지나친 애정공세는 독이 될수도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리퍼트 대사는 결국 미국 공무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국익이 첨예하게 맞붙을 때 리퍼트는 당연히 미국을 위해 일하고 발언할 것입니다. (그래서 리퍼트 대사의 스킨십 외교도 마냥 좋아라 할 일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리퍼트를 찾아가서 '빛샐 틈 없는 동맹'만을 강조하면서 과잉 애정공세를 펼쳤던 우리 정치인들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미국과 한국이 같은 나라가 아닌 이상 두 나라의 국익은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권력의지를 가진 정치인들이 모든 계기를 정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십분 이해합니다만, 국익과 나라의 자존심은 지켜가면서 싸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 한국은 어떤 나라로 비춰졌을까요? 뉴욕타임스 기사(하단 링크 참조)를 보면 '미국과의 빛샐 틈 없는 동맹국'이기보단 '찢기운 나라, 양극단의 나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차분히 이번 사건에 비춰진 우리 모습을 돌이켜 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South Koreans Divided on Reactions to Knife Attack on U.S. Ambassador Mark Lippert <NY Times>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