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서울대 펑크설'의 진실…입시교육의 자화상

[취재파일] '서울대 펑크설'의 진실…입시교육의 자화상
사건은 이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성적 지상주의 대한민국의 자화상 같은 사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서울대 경영대가 너무 가고 싶던 대학 4학년 재학생이, 위조된 수능 성적표를 사용했습니다. '서울대 경영대를 위해서라면!'...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 해 12월 22일 정오 무렵, 서울대 지원 예정자를 자처한 한 '수험생H'가 '만점에 가까운 내 성적표를 공개한다'며 한 입시정보 사이트에 수능 성적표를 올렸습니다. (글 전개 편의상 '수험생H'라고 하겠습니다.) 수험생 H는 "본인과 회원 70여명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고, 서울대 경영학부와 사회대에 대거 지원할 것"이라며, 다른 수험생들에게 "자신 있으면 당신들 성적표도 '인증'(=공개)하라"고 했습니다.

처음 H의 글만 올라왔을 때는, '서울대 경영대와 사회대 합격선이 각각 수능 표준점수 800점 기준 531점과 528점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H의 글을 믿지 않았습니다. 경쟁자들의 하향 지원을 유도해 본인의 합격 가능성을 높이려는, 속칭 '훌리'일 것이라는 댓글이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수험생H는 이 성적표를 공개하고 '그래도 내 말 안 믿을래?'라고 반격에 나선 겁니다.

수험생H가 성적표를 공개한 때는, 공교롭게도 서울대학교 정시모집 원서 접수 마감을 6시간쯤 앞두고 있어 '마지막 눈치 작전'이 치열할 때였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다가 사건 제보자를 만났습니다. 지난 1월에 기사 준비는 했지만 방송으로 나가지는 못했던 제보자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 사건을 풀어보겠습니다. 수험생들이 많이 쓰는 수험 용어도 함께 설명드립니다.
입시 인터뷰
수험생(서울대 지원 학생)

"서울대가 정원 미달인 적은 없지만 가끔 예년보다 컷(커트라인)이 낮게 나올 때가 있는 거죠. 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이 다른 과로 지원하거나 아니면 아예 지원을 안 하면서 평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성적이 점수대가 낮은 아이들이 합격이 되는 상황인데요."


"올해는 ****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오르비스 옵티무스'(상위권 입시정보 교환 사이트)에 자기 성적표를 '인증' 하면서, 자기랑 비슷한 성적대 애들이 자기가 만든 성적 공개 카페가 있대요. 거기서 성적 공개를 해봤는데 이 성적대의 애들이 많다고 그러면서 아마 자기 예상대로는 서울대 환산식으로 530점대 정도가 서울대 경영 컷이 되지 않을까 하고 그 사람이 예측을 해서 글들을 많이 올렸어요. 자기가 만든 성적공개 카페에서 530점대 애들이 엄청 많아서 아마 이 숫자들만 실제로 지원 다 하면 서울대 경영이나 사회과학 컷이 530대 528점대 이 정도가 될 것 같다고 인증을 했죠. 정시 원서 넣기 전이었어요."

"처음엔 댓글 중에는 약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성적표 공개하기 전에는 다들 안믿는 눈치였어요. 그러다가 성적표 공개를 하니까 믿는 쪽으로 기울다가..."

"서울대 쓸 성적대 애들이 엄청 성적이 낮진 않잖아요. 근데 보통은 서울대 경영권이 제일 높고, 그 다음이 사회과학대, 그 다음이 인농소 라인, 인문대랑 소비자아동학과, 농경제학과 이렇게 불리는데. 보통 그렇게 순서대로 점수컷이 형성이 되는데 올해가 서울대 경영이 아마 인농소랑 비슷한 정도로 내려왔다고 하더라구요. 실제로 연세대 경영이 서울대 경영보다 컷이 높았다고 해요."

"실제로 그 점수대 애들이, 붙을 수 있는 애들이 '쫄아 가지고' 하향 지원을 해서 올해 서울대 경영이 '펑크'(=평소보다 커트라인이 낮게 형성)가 났다고 다들 생각을 하고 있죠. 아마 실제 그 점수대 애들은 약간 하향지원하지 않았을까 하고 예측하는 거죠."

"이렇게 '펑크'나고 그러는 것은 자주 있던 일이라서 신경은 안 쓰고 있었는데. 수험생들은 다들 이런 것도 입시의 일부라고는 생각하고 있죠."

입시 인터뷰
완전 범죄가 될 뻔했던 수험생H의 덜미를 잡은 건, 성적표에 찍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의 직인이었습니다. 타이포그래피, 즉 글꼴이나 폰트에 관심 많은 네티즌이 '폰트가 이상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수험생H가 '인증'한 성적표 도장은 'HJ한전서A'체, 보통 도장 만들 때 많이 쓰는 폰트이고, 평가원장 직인과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네티즌 수사대의 위력이랄까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해당 사이트를 링크해 놓겠습니다.)
▶ 보러가기

이후 수험생H는 해당 사이트에서 문제의 글을 모두 삭제하고 사이트도 탈퇴했습니다. 경찰은 IP 추적 등에 나섰지만 한달이 넘게 H의 신병을 확보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드디어 사건 발생 두 달이 지난 지난주 경찰이 수험생H를 소환조사했습니다. 수험생H는 서울 중위권 대학의 경영학과 4학년 재학생으로 밝혀졌는데요. "서울대 경영대가 가고 싶어 그랬다"고 자백했습니다. "성적표는 내가 위조한 게 아니고 인터넷에서 5만원 주고 샀다"고 합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서울대 경영대는 낙방하고 말았고요.

입시기관들에 따르면 서울대 경영대 합격선이 예년보다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수능 성적표 표준점수 합계 기준으로 서울대 정시 인문계열 최종합격선은 사회과학계열(526.8), 인문계열(526.3), 농경제사회학부(526.3), 소비자아동학부(526.2), 국어교육과(525.5), 역사교육과(525.4), 사회교육과(525.1), 영어교육과(524.8), 지리교육과(524.8), 경영대학(524.5) 순으로 추정된다는 겁니다. 지난 몇년동안 서울대 정시 최상위 합격권이었던 경영대 합격선이 유독 올해만 하위권으로 내려왔습니다.

지난 해 수능 시험은 '쉬운 수능' 기조로 출제되다 보니 최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크게 변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상위권대 정시전형은 상대적으로 재수생들이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수, 삼수생들이 또 재수·삼수는 할 수 없으니 대거 하향 안전 지원했을 것으로 보는게 대다수 입시기관의 분석입니다. H의 영향력은 미미했겠지요.

수험생H의 '반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가고 싶던 서울대 경영대에는 탈락했고, 경찰 수사 대상까지 됐습니다. 국가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발행한 수능 성적표는 '공문서'입니다. H는 공문서 위조와 위조 공문서 행사, 두 개의 혐의를 받고 있는데요. 형법 제225조 공문서 위조 및 229조 위조 공문서 행사 조항에 의거,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고요. 벌금형 조항이 없는, 징역형(내지는 집행유예) 밖에 없는 범죄입니다.

H의 위조 성적표가 정말로 서울대 입시에 영향을 끼쳤는지, 이 성적표 때문에 입시에서 손해를 봤다고 주장할 수험생이 실제로 나타날지는 미지수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한 네티즌이 흘린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에 오롯이 기댈 만큼 우리 수험생들이 나약하지 않았을 걸로 믿고 싶습니다.

요즘 각종 입시 정보에, 입시 컨설팅에, 수험생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유혹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보고 있노라면 "소신 지원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입시지옥, 성적지상주의, 학벌주의 대한민국 교육이 이제는 이런 종류의 '입시 낭인'을 만들어내는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합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