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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공구남'을 어떻게 믿나요?"…댓글로 본 신뢰

[취재파일] "'공구남'을 어떻게 믿나요?"…댓글로 본 신뢰
"기자가 제 정신인가?"

"검정코트 입고 넥타이 멘 남자가 집집마다 초인종 누르면서 공구를 빌리려 한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의심이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나뿐이지…"


열에 아홉은 비판이었습니다. 5년 남짓 짧은 기자 생활동안 이렇게 많은 비판 댓글은 처음이었지요. 이웃 주민들에게 공구를 빌리러 다닌 기사 내용을 보고 저를 '공구남'이라고 칭하며 '이상한 실험'이라며 비판하는 기사도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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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기사는 올해 SBS의 연중 캠페인인 '배려, 대한민국을 바꿉니다' 시리즈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배려가 부족한 이유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번 기사의 주제였지요. 남을 믿지 못하면 친절을 베풀거나 신뢰할 수 없다는 내용을 전달하는 게 기사의 목표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을 보여주는 게 제 기사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3년 가까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이웃 가구를 방문해 공구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 얼마나 문을 열어줄 지를 알아봤습니다. 방문한 54가구 중 33가구에서는 인기척이 없었고 나머지 21가구 가운데서는 8가구가 문을 열어줬고 13가구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요.

자신을 이웃이라고 주장하는 낯선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불신하고 경계할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매일 언론에서 보도되는 흉악한 사건사고로 인한 불안, 낯선 이에 대한 경계,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는 개인주의 등 갖가지 원인으로 낯선 사람은 일단 경계하고 봐야 하는 우리의 각박한 모습이 곧 상대를 불신하는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문을 열어주는 게 옳고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게 틀린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사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고 해서 주민들의 음성은 변조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사의 댓글처럼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렸습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담도 없이 한 동네 이웃들이 어울려서 지냈는데 이제는 이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각박해졌다"며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져 우리 사회의 불신이 높아진다"고 말했습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신뢰라는 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신뢰라기보다는 낮선 사람에 대한 경계, 불안 등을 보여 준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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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개의 댓글은 제가 알아본 방식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신뢰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많은 호응을 받은 댓글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무섭다"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낯선 사람에겐 눈도 마주 치지 말라고 교육받아왔는데 이제 와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문을 안 열어줘서 각박하다고?"라는 댓글도 있었지요.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사는 일본에선 엘리베이터도 기다려 주고, 마주치면 인사도 하고, 엘레베이터에서 내릴 때 '잘가요', '실례합니다'란 인사를 꼭하지, 청소하는 아줌마와도 인사 잘 하고 지내는데 한국은 참.."이라는 댓글처럼 경계든 사고에 대한 걱정이든 불안이든 다양한 이유로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한탄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방송 직후 반응을 보면서 제가 알아본 방식이 우리 사회의 신뢰를 보여주는데 가장 적확한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범행을 할 생각이 있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흉기를 가지고 집을 찾아갈 것이라고만 생각해 공구를 빌려보기로 결정했지만 공구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위협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많은 댓글처럼 이웃집을 찾아가보는 게 각박한 현실을 보여주는지 불안을 보여주는지 신뢰를 보여주는지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공감한 사람보다는 제가 알아본 방식에 대해 비판이 많았다는 게 이를 방증하겠지요. 기사를 쓸 때 왜 한 번 더 고민하고 한 번 더 따져보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하게 됐습니다.

기사와 반응을 보면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참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안전에 대한 믿음, 개인주의나 제도적 불평등 해소 등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돼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장 저부터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댓글에도 있었지만 3년 가까이 살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눈 주민들이 많습니다. 이번 기사는 여러모로 많은 것을 배우고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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