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의 사소하게] 그들이 '세상의 소금'이다

이주형 기자 joolee@sbs.co.kr

작성 2015.03.02 16:44 수정 2017.02.14 19:1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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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Genesis): 세상의 소금.

세종문화회관 옆을 지나다 우연히 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소비지상주의 사회를 살고 있으므로 이 단어를 듣고 맨 처음 떠오른 건 현대자동차의 프리미엄 세단이었다.

'뭐야, 프리미엄 세단만큼 멋진 전시회인가? 1만 2000원하는 입장료도 프리미엄급이군.' 대략 이런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사이 웬만큼 이름있는 작가의 사진전도 다 이만큼 한다는 사실...)

'제네시스'는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전시회였다. 사진들은 대개 대자연의 '풍광'을 찍은 것들로 보였다. 기본적으로 자연 다큐멘터리에 대한 큰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가격도 부담스럽고 해서 '그냥 저런 게 있다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전시 마지막 날이 가까워오자 왠지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르니 대가가 찍은 자연은 어떻게 다른지 보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홀로 찾아간 전시회는 정말 대박(정말 쓰기 싫은 말이다)이었다. 그게 전시회 마감 전날만 아니었으면 사진을 좋아하는 한 선배에게 전화해 와서 꼭 보라고 조언하고 싶을 정도로.(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전시회는 한 달 반이나 연장했다가 끝났다. 영화는 아직 상영 중이다)

● "지구의 46%는 아직도 창세기 때의 상태로 남아있다"

마치 제네시스(genesis:창세기, 기원, 시원)에 나오는 듯한 자연과 동물과 사람들. 원시림과 갈라파고스 제도 등지에서 찍은 살가두의 사진은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고 갔지만, 나에게는 뭔가 굉장한 드라마가 담긴 휴먼(동물까지 포함한) 다큐멘터리로 다가왔다.

한 장 한 장이 모두 '장관'(壯觀)이라고 감히 일컬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었고, 개인적으로는 거센 파도가 치는 혹한의 바다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그의 자세를 보면, 안다.) '투신'(投身) 하는 작은 펭귄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 사진 보러 가기)

사진전을 보고 나오면서 안 사실은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의 거장 빔 벤더스가 살가두의 사진을 주제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었다.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1999), '피나'(2011)를 잇는 우리 시대의 예술가 3부작, 오늘(3월1일) 드디어 그 영화를 보았다.

원래 경제학을 전공했던 지식인 살가두는 파리와 런던에서 공부하고 일하던 중 아내 렐리아가 사온 카메라에 빠지게 된다. 결국 전 재산을 처분해서는 최고급 카메라와 촬영 장비를 구비해서 사진가로 나선다. 그의 나이 '서른 즈음에'. (그도 대단하고 부인은 더 대단하다. 부인은 후에 살가도의 프로젝트를 기획, 전시하는 일을 하게 된다) (역시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려면 '투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다...)

결혼사진, 누드사진 등등 닥치는대로 찍으며 사진을 배워나가던 살가두가 이윽고 향한 곳은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현장들이었다. 기아, 전쟁, 살육, 난민, 노동의 현장에 살가두가 있었다. 한번 집을 떠나면 수 년씩 현장에 머물렀다. 그렇게 담아낸 사진들은 세계인들에게 시대의 비극, 아니 지구의 비극을 일깨웠다. 또 그의 사진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나 20년 넘는 지난한 작업 끝에 그는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영화 속에 나오는 그의 사진을 보면 왜 그런지 이해하게 된다. 때로는 짐승만도 못한게 인간이다) '아내와 사랑을 나누는데 정액 색깔이 피빛이었다'고 할 정도로(이 말은 빔 벤더스 영화에는 안나오는데, 또 다른 다큐멘터리이거나, 아니면 살가두의 TED 강연에서였던 것 같다) 몸도 피폐해갔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가 20년 넘게 다닌 곳은 인간이 거주하기에 최악의 환경들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고 생각하고 비극의 현장을 떠났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후세인의 방화로 불타오르는 쿠웨이트 유전을 TV뉴스로 보다가 현장으로 달려갈 정도로, 천생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 2004년, 살가두는 제네시스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인간을 찍던 사진가가, 그걸로 성공한 사진가가 자연을 찍겠다고 마음 먹다니. 그것도 환갑의 나이에... 그의 도전에 머리가 숙여졌다.

자연이라고 해서 편안한 곳을 다닌 것이 아니다. 열대 우림, 극지방... 그곳에서 그는 우리와 이 행성에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존재들을 포착했다.

영화 초반 살가두가 바다사자를 찍으러 간 시퀀스가 나온다. 한 장의 사진을 건지려고 바닷가 자갈밭을 구르며 피사체에 접근하는 늙은 포토그래퍼.(포토는 '빛'이란 뜻이고 그래피는 '쓰다', '그리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거구의 백곰 때문에 바다사자들이 뭍으로 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숙소 코 앞까지 다가온 백곰...

줌 렌즈로 당겨 찍으면 눈까지 클로즈업할 수 있을 정도로 빤히 보이는 거리에서 북극곰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살가두는 무시한다. 적절한 배경이 보이는 앵글이 아니기 때문에 찍어봤자 울림이 있는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란 무엇인가 엿볼 수 있었다. 사진을 찍거나 안 찍거나 그는 늘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살가도를 깊고 완숙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또 한 명의 예술가. 쿠바의 음악인들과 천재 무용가 피나 바우쉬에 이어 세바스치앙 살가도까지 세 명의 예술가를 필름에 담아온 빔 벤더스.

제네시스. 어떤 공간과 환경에서도 창세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노인이고, 거장이고, 예술가다. 일흔이 넘은 그들이야말로, 그 둘이야말로 , '세상의 소금'(The salt of the earth)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