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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필름' 끊긴 사이 '대리기사 폭행범'…3년 만에 무죄 확정

대리기사에게 운전을 맡긴 후 잠에서 깨보니 폭행범이 돼 있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뒷좌석에서 잠 든 기억 외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리기사는 합의금을 내놓지 않으면 운전자 폭행 혐의로 고소한다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3년 전쯤 김 모 씨가 실제 겪었던 일입니다. 2012년 7월 9시쯤 김 씨는 친구와 함께 서울 역삼동에서 술을 마신 후 대리기사 이 모 씨에게 운전을 맡겼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김 씨의 친구는 대리기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습니다. 술에 취해 조수석 뒷좌석에 앉아 있던 손님 김 씨(피고인)가 갑자기 일어나 왼손으로 대리기사의 머리를 잡아 뒤로 젖히고 뒤통수를 수차례 때렸다는 것입니다. 대리기사 이 씨는 피고인 김 씨 친구와 스피커폰으로 통화했고, 통화 중 녹음 기능을 이용해 당시 상황을 녹음했습니다.


▲ 당시 상황 녹음 파일

● 통화 1  대리기사 이 씨-피고인 김 씨 친구

대리기사 : 난리예요, 지금.

손님 친구 : 이상하네. 걔(친구), 안 그러는데.

대리기사 : 저 지금 이거 녹음 다 해놨습니다, 지금. 아 지금. 아, 지금 1km 밖에 안 남았어요. 지금. 아저씨 저리 좀 가세요, 지금. 아 주먹 쥐지 마시고, 제가 지금.

손님 친구 : 네, 네, 네.

대리기사 : 이 손 좀 놓으시고. (배경에 누군가 말을 하는 소리가 언뜻 들림)

손님 친구: 지금 어디, 어디 세요?

대리기사 : 지금, 지금 저 여기 00 사거리예요. 지금 여기. 1km 남았습니다.

손님 친구 : 1km 남았으면 거의 도착했는데 지금. (친구가) 왜 그러지?

대리기사 : 뒤에서 지금 멱살 잡고 때리고, 예? 아 지금 살 떨려서, 아 저리 건, 건들지 좀 마세요 지금. (한숨) 아 왜 그러세요, 진짜. 아, 진짜 건들지 말라고. 저 지금 그 지금 mp3 파일에 다 녹음 다 지금 어, 어쨌든 했어요.

손님 친구 : 네, 네, 네.

대리기사 : 아, 제가 살 떨려서 지금 제가. 어차피 이제 1.2km 남았는데 지금 사모님 모셔다 드릴 텐, 드릴 건, 드릴 건데요. 저 오늘 이대로는 그냥 못 가요.

손님 친구 : 전화를 끊고요,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대리기사 : 네. 

● 통화 2  대리기사 이 씨-피고인 김 씨 친구
[취재파일] 채희선
대리기사 : 지금 5km밖에 안 남았는데 제가 어쨌든 모셔다 드리고 저 경찰서로 가든지 그렇게 할 거예요.

손님 친구 : 아니, 그러지 마시고요.

대리기사 : 아니 저 지금 모가지가 막 뒤로 막 날아가려고 그래, 지금 여태까지 지금 전화가 지금 얼마나 지금 심하게 지금 이게 제가, 완전히 모욕감도 아니고 이게 목소리가 다 떨려요, 사장님.

손님 친구 : (친구를) 좀 잠깐 좀 바꿔주실래요.

대리기사 : 아 제 전화기는 안 되겠고 제 전화기는 안 되니까요.

손님 친구: 예.

대리기사 : 전화 하셔가지고 얘기를 하시든지 어떻게 하시든지 하세요. 저 지금 분명히 내려서는

손님 친구 : 와이프 전화 힘들텐데.

대리기사 : 예. 아까 끊으셨는데 저 내려서는 분명히 얘기를 할 겁니다.

손님 친구 : 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이 결정적인 증거 때문에 1심에서 피고인 김 씨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피고인 김 씨의 차량에는 블랙박스가 설치돼 있지 않았고, 도로에 설치된 CCTV에도 폭행 정황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대리기사 이 씨는 “(CCTV가 설치된) 톨게이트를 지날 때는 피고인 김 씨가 잠잠하다가 톨게이트를 딱 지나는 순간부터 다시 폭행했다”고 법정에서 주장했습니다.

의심스러웠지만 1심 재판부는 대리기사 이 씨의 폭행 시점 관련 진술이 일관되지 못한 것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기억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또, 피고인 김 씨에게 대리기사가 합의금을 요구했었다는 부분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증거는 오직 대리기사 이 씨가 폭행 상황을 녹음한 파일뿐이었던 것입니다.

1심 판결을 인정할 수 없었던 김 씨는 항소했고, 2심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피고인 김 씨가 대리기사를 폭행한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1심에서 유죄의 결정적인 증거였던 녹음파일이 오히려 무죄의 증거가 됐습니다.
[취재파일] 채희선

‘멱살 잡고 때리고, 예? 지금 살 떨려서….(후략)’ 긴박한 상황을 녹음한 파일에는 대리기사 이 씨의 목소리 외에 폭행을 짐작할만한 어떤 소리도 녹음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 김 씨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옷깃 소리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대리기사 이 씨가 휴대전화 스피커폰 기능을 이용해서 통화와 녹음을 했다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피고인 김 씨의 소리도 녹음됐어야 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입니다. (법원이 의뢰한 감정 결과에 따르면 파일에는 대리기사 이 씨의 음성이 녹음된 반면 피고인 김 씨의 음성으로 인식될만한 소리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발음이 불분명한 사람의 음성이 일부 확인됐습니다.)

2심 재판부는 대리기사 이 씨의 주장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그 상황 역시 대리기사 이 씨가 녹음한 파일에 근거해 판단할 때 상식에서 벗어났습니다. (위 녹음파일 참고)

‘대리기사 이 씨는 피고인 김 씨의 차를 운전해서 경부고속도로 서초 IC 부근을 시속 80km로 주행했다. 그러던 중 피고인이 10분에 걸쳐 자신의 머리를 잡아 뒤로 젖히거나 뒤통수를 수차례 때렸다. 상황이 다급하고 핸들을 놓치면 바로 사고가 날 것 같아서 대리운전을 의뢰했던 피고인의 친구에게 전화해 피고인 김 씨를 진정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 통화 내용을 녹음했다’

피고인 김 씨가 대리기사 이 씨 주장대로 이 씨의 머리를 뒤로 젖혀질 정도로 잡아당겨서 간신히 핸들을 붙잡고 금방이라도 교통사고가 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면 (대리기사가 법정에서 이 사건으로 다시 운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진술함) 즉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피고인을 직접 제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대리기사 이 씨는 차를 세우지 않고 시속 80km로 차를 계속 고속 주행해서 사고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피고인 김 씨 친구에게 전화하고 적극적으로 녹음까지,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했는지 의심스럽다고 재판부는 판단했습니다.

2심 재판부 판결 관련해, 피고인 김 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운전자 폭행 등) 혐의로 기소했던 검찰도 상고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김 씨는 3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취재파일] 채희선
피고인 김 씨의 법정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리기사 이 씨와의 청구액 2천만 원짜리 손해배상 민사소송이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대리기사 이 씨는 1심에서 김 씨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진 후 소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대리기사는 2심의 무죄 판결 후 민사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민사소송을 위해 법정에 원고가 직접 출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김 씨에 따르면 그동안 대리기사 이 씨는 단 한 차례도 재판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합니다.)

2012년 7월 밤, 정말 김 씨가 대리기사를 폭행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재판부는 김 씨가 대리기사를 폭행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고, 김 씨는 이 판결이 자신의 누명을 벗겨줬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도 김 씨에게 지난 3년은 악몽일 뿐입니다. 김 씨는 대리기사를 무고 혐의로 고소할 생각은 없습니다. 혐의에 대한 입증이 쉽지 않은 점을 차지하더라도 또다시 수년간의 법정 다툼을 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 김 씨의 마음입니다. 김 씨는 다만, "다시 그 대리기사를 만나게 된다면 ‘미안하다’는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 '필름 끊겨서' 폭행범 몰려…누명 벗겨준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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