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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의 논픽션] '오호, 통재라'…영화계, 유신시대로 회귀하나

[김지혜의 논픽션] '오호, 통재라'…영화계, 유신시대로 회귀하나
한국 영화계가 본격적으로 검열의 시대에 접어드는 것일까. 문화·창작활동의 제1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정부 규제로 침해당할 위기에 처했다.

3일 한국영화아카데미(KOFA)는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추진하는 영화등급분류면제추천 관련 제도 개정과 관련한 논란과 연동되어 우리 영화제도 등급분류면제추천을 받지 못해 부득이하게 행사를 취소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KOFA는 봉준호, 최동훈, 허진호, 김태용, 장준환 감독 등 현재 충무로를 이끄는 감독을 배출한 전문교육기관이다. 충무로의 젖줄과 같은 역할을 해온 KOFA의 졸업영화제가 규제 때문에 취소된 것은 1984년 개교 이래 최초의 일이다.

이에 대해 영화 '광해'를 제작한 리얼라이즈 픽처스의 원동연 대표는 트위터에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로 밥 벌어먹는 선배로서 그리고 한 영화인으로서 진심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도대체 세상은 아니 이 나라라는 우리같은 딴따라를 왜 투사로 만들려고 하는가? 피눈물이 흐른다"고 통탄했다

행사 취소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등급분류면제규정 폐지 건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산하 기관. 영화계에서는 영진위가 KOFA 졸업영화제를 취소시키면서 영비법 개정의 시범케이스를 보인게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보내고 있다.

더불어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열리는 영화제도 연이어 철퇴를 맞는 것은 아닌지 영화계에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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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비법 개정, 검열 시대 열리나

영화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 영화진흥위원회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영비법) 제29조 1항 단서조항 영화상영등급분류 면제추천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영화상업등급분류 면제추천은 영진위나 정부, 지자체 등이 주체하거나 주관, 후원하는 영화제 등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의 등급분류를 면제해주는 제도다. 영상상영 등급 분류를 받지 않은 영화도 조건에 맞는 영화제라면 30일 이전에 신청할 경우 등급분류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영진위가 추진하는 개정안은 30일에서 60일 이전으로, 또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9인 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해야만 상영이 가능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영화계에서는 사실상의 사전 검열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영화제에서 상영될 영화가 일일이 심의를 받게되면 결국 사회˙비판적인 영화가 채택될 가능성이 적어지고, 세계적 거장의 수작 또한 소재 혹은 노출 수위 등을 이유로 상영되지 못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기간도 문제다. 기존 30일보다 빠른 60일 전 신청해야 한다면 영화제에 상영될 해외 프리미어(최초 상영) 영화나 칸, 베니스, 베를린 등 국제영화제 상영작을 유치하는데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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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부산영화제 위축 우려…"축제 앞두고 이 무슨 날벼락"

KOFA 졸업영화제 취소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영진위 측은 등급분류면제추천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제를 허가해줄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번 일은 단순히 졸업 행사를 취소한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영진위의 규제가 보다 엄격해지리라는 것을 보여준 예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일로 인해 영화계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영화제가 위축될 우려가 크다.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국제영화제 이력이 3년 이상 된 영화제에 대해서는 일괄 심의를 해왔다. 등급 역시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내렸고, 상영작이 정식 개봉하게 되면 영등위의 심의 절차에 의해 개봉 등급을 받았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영화제 선진국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나마 최대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인정해준 셈이다. 그러나 개정안은 9인의 심의위원회를 통한 개별심의를 기본으로 한다. 이를 통해 영화제 상영작을 규제하겠다는 의중을 엿볼 수 있다.  

한 영화제 관계자는 "칸, 베니스 출품작, 유명 감독의 신작을 어떻게 미리 초청할 수 있겠냐. 각 작품의 편집 시기 및 공개 시기 등의 여부는 영화제가 결정할 수 없다. 때문에 개,폐막작의 경우 한달 전에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또 "9인의 위원회가 몇백 편에 이르는 상영작을 일일이 보고 평가하는 게 시간상 가능한 일인가. 이는 영화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개정안이다. 영화제를 죽이겠다는 의도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당장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등이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경우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상황.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서 20주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세계 영화계에서도 주목하는 일이다. 어느 해보다 전력을 다해 축제를 준비해야 할 상황에서 규제의 칼바람이 몰아친다면 영화제 내외부적 위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관계자는 "중국에서 열리는 영화제가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성장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모든 영화를 검열하기 때문"이라면서 "영화제는 일종의 해방구다. 특별한 플랫폼 아래에서 창작자가 의도한 대로 만든 오리지널 영화를 자유롭게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장이다. 일반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틀려면 뭐하러 영화제를 하느냐. 검열이 시작되는 순간 영화제의 메리트는 사라지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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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영화전용관 지원도 흔들…"시키는 대로 해라?"

예술영화에 대한 지원도 기준이 바뀔 전망이다. 올해 예술영화전용관 지원사업도 영진위 심사를 통해 인정한 영화만 상영해야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예술영화관은 영진위가 선정한 26편의 영화를 일주일에 이틀 동안 상영해야 극장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영화계는 이 역시 사전 검열의 일환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2일 독립예술영화전용관모임, 독립영화전용관 확대를 위한 시민모임,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등은 공동성명서를 내고 "영화진흥위원회의 일방적인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 사업 폐지 시도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영진위의 개편 방향은 독립·예술영화 시장의 자율성을 해칠 우려가 크다"고 주장했다.

국내 영화 시장에서 예술영화는 상업 영화에 비교하면 설 자리가 부족하다. 그나마 예술영화전용관이 있기에 참신한 시각과 개성 있는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들이 상영의 통로를 마련해왔다. 그러나 영진위 측이 추진하는 데로 법이 바뀐다면 상영의 창구는 줄어들고 예술영화전용관 역시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이런 환경이 조성된다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창작 권리도 저해될 수밖에 없다.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틀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한 영화 관계자는 "영진위는 개정안을 마련해 '원칙대로 심의하고 규제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영화인들의 자율권을 박탈하겠다는 결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영화계 반발을 의식한 듯 지난 2일 김세훈 영진위원장은 부산,전주,제천,여성영화제 각 집행위원장들과 면담을 나눴고, 5일 정기회의에서 상정하려 했던 영비법 개정을 보류 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영진위는 4일 오전 보도자료를 통해 "'영화상영등급분류 면제 추천에 관한 규정'은 제도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행정 서비스로 개선하고자 내부 검토를 하고 있으며, 영화계와의 의견 수렴 및 검토를 거쳐 개선방향을 확정하고 추진할 계획이다"라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처럼 영비법 개정이 가시화 되면서 어떤 방향과 내용으로 이뤄질지에 영화계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지난해 한국 영화시장은 2조 원 시대를 맞았지만, 외화내빈(外華內貧)에 영화인들의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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