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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가 세종에게 올린 장계, 영어로는 어떻게 옮겼을까

세종 재위 1년인 1419년 5월10일(음력).

세종은 충청도와 함길도에 파견된 사헌부 감찰관 행대감찰로부터 빈민 구휼 상황을 보고받습니다.

당시 충청도에는 김종서가, 함길도에는 최문손이 행대감찰로 나가 있었습니다.

세종실록은 그날 두 번째 기사로 이 사안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정사를 보았다. 충청도 행대감찰 김종서가 장계를 올리기를 '도내 각 관청에 기민이 남녀 장정과 약한 자 모두 12만2백49명인데, 진제한 미곡이 1만1천3백11석이고, 장이 9백49석이라' 하였고, 함길도 행대감찰 최문손이 장계하기를 '기민이 1만2천2백23명이라' 하니, 임금이 김종서의 장계한 바로써 각 도 감사에 명하여 '병이 있는 집에는 등급을 높여서 진제하게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세계가 인정한 기록유산이지만 원문 자체가 한문이고, 국문으로 옮겨서도 여전히 수많은 한문 표현이 남아 있어 한국인이 읽기에도 쉬운 텍스트는 아닙니다.

그런 텍스트가 영문으로 옮겨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2012년부터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세종실록 전문을 영문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편이 그간 영역을 완료한 텍스트 일부를 살펴봤습니다.

앞서 소개한 1419년 5월10일자 기사는 이렇게 옷을 바꿔입었습니다.

"[The King] conducted state affairs. Investigating Censor 行臺監察 dispatched to Chungcheong Province 忠淸道 Kim Jongseo 金宗瑞 reported, 'Starving people in their respective districts of the province, [including] men and women and the mature and the young, total one hundred twelve thousand two hundred forty nine people. Relief rice [totals] eleven thousand three hundred eleven seok, and bean paste nine hundred forty nine seok.'(후략)"

국역본과 비교하면 그저 평범한 번역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문 원문을 함께 살펴보면 영역문이 원문을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영역된 실록의 주요 예상 독자층에 외국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한문 원문을 웬만큼 읽을 줄 알고 자구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이들을 위한 번역문이라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정사를 보았다'를 옮긴 '[The King] conducted state affairs'의 원문은 '視事'입니다.

원문에서 주어가 생략됐으므로 번역문에서도 생략하되 '[]' 안에 생략된 주어 '임금'(The King)을 넣었습니다.

'[including]' '[totals]' 등도 원문에는 없으나 영어 문장 성립을 위해 필요한 단어들을 추가한 것들입니다.

실록 영역에서는 한자로 된 옛 어휘를 적확한 영어로 옮기는 일이 중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정부 기관명, 관직명, 문헌명 등을 단순히 발음대로 옮기는 수준이 아니라 이름에 담긴 의미가 전달되도록 영문명을 새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5월10일자 기사 중 '행대감찰'을 'Investigating Censor'로 옮긴 것이 한 예입니다.

5월17일자에 등장하는 사법기관 의금부는 'the State Tribunal'로, 지금의 법무부 격인 형조 는 'the Ministry of Punishment'로 번역됐습니다.

같은 달 19일자 9번째 기사에서는 '상정고금례'라는 문헌이 언급됩니다.

영역본은 이 책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예법 사례를 수집한 기록이라는 의미를 풀어 'Prescribed Ritual Texts of the Past and Present'로 길게 옮겼습니다.

모든 번역이 그렇지만 실록 영역은 어휘의 용례를 사전식으로 꼼꼼히 정리하는 일이 필수입니다.

워낙 방대한 탓에 용례사전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번역자마다 중구난방으로 말을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편 작업팀은 세종실록 영역을 진행하면서 일반 어휘는 물론 중국, 일본, 몽골, 여진족 등 국가와 민족별 인명과 지명 등까지 사전식으로 함께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진족 언어처럼 현재 쓰이지 않는 언어는 한자로 옮겨진 발음이 아닌 원어 발음을 찾는 일 자체가 하나의 연구에 가깝습니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국학의 여러 학파별로 용례를 정리한 점도 눈에 띕니다.

이를테면 공물이라는 단어를 이기백 학파는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지, 미국의 팔레학파는 어떤 맥락에서 사용했는지 등을 사례와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실록 영역사업을 담당하는 이순구 편사연구관은 "인명이나 지명의 경우 당시 사관 이 들리는 대로 이두를 사용해 표기한 탓에 정확한 발음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영역을 하면서 용례사전 작성과 같은 기초작업의 필요성을 크게 실감하고 번역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번역작업에 투입된 인원은 많지 않습니다.

역사학적 지식과 영어능력을 함께 갖춘 번역요원 6명, 교열자 1명, 감수자 1명이 한문 원문을 기본 텍스트로 하고 국역본을 참고하면서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올해 3~4명가량 인원이 늘 것으로 예상됩니다.

실록 영역사업은 우여곡절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2012년 착수 당시에는 실록 전체를 번역할 계획이었으나 너무 방대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전문 번역은 세종실록으로 한정했습니다.

세종 재위 당시 정치·사회·제도적 변화가 많아 세종실록이 '실록의 꽃'으로 불린다는 점을 고려했습니다.

올해 중 세종 5년치까지 완료할 것으로 예상되며 2023년 완역이 목표입니다.

이후에는 주제별로 실록을 발췌 번역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이달 중에는 영문 세종실록 사이트도 문을 엽니다.

번역이 최종 마무리된 세종 1년8월까지 분량이 1차로 공개되며, 용례사전도 함께 제공될 예정입니다.

이순구 연구관은 "국제 학계에서도 국편의 실록 영역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외국의 한국학자들도 기본적으로 한문을 해석할 줄 알지만 영역본이 제공되면 실록 연구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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