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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구제역 발병 '농가 탓하기'의 추억

도 넘는 농가에 책임 떠넘기기

[취재파일] 구제역 발병 '농가 탓하기'의 추억
2010년 11월 2일 경북 안동에서 양돈업을 하는 권 모 씨는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났다. 안동시 상공인들과 농. 축산업자 등 30여명이 같이한 여행이었다. 일행 중 축산업자는 권 씨를 포함해 3명이었다. 한 명은 한우를 키웠고 두 명은 돼지를 키웠다. 4박5일 일정의 여행에서 권 씨 일행은 하노이와 하롱베이 등을 다니며 북베트남의 화려한 정취를 만끽했다. 그 때만해도 권 씨를 포함한 축산 농민 3명은 이 여행이 자신들에게 주홍글씨를 남기는 악몽이 될 줄은 몰랐다. 한국에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 7일 도착했다.

21일 뒤 안동에서 구제역 발병이 확인됐다. 돼지 농장 2곳에서 처음 시작됐고 한우 농가로도 번졌다. 이렇게 시작된 구제역은 다음해 4월까지 전국의 축산 농가를 초토화시켰다. 3월 24일 종식 선언을 했지만 다음 달 경북 영천에서 구제역이 재발하면서 방역 당국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소. 돼지 346만 마리가 살 처분 됐다. 3조원에 가까운 국가 예산이 살 처분 비용, 농가 보상금 등으로 들어갔다. 지하수 오염을 비롯한 환경 비용, 소. 돼지를 살 처분하면서 받은 국민적 트라우마 등 사회적 비용까지 합하면 피해는 추산 불가라는 평가였다. 유정복 농림장관이 사퇴했다. 가축 전염병으로 인한 사상 최악의 피해였다.

현 농림축산검역본부의 전신인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권 씨를 포함한 축산 농민들의 베트남 여행을 구제역 발병 원인으로 지목했다. 베트남을 다녀오면서 구제역 바이러스를 옮겨 왔다는 것이다. 유정복 장관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대통령까지 거들었다. 구제역을 언급하며 발병국을 여행할 때는 방역에 조심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농민들의 베트남 여행이 구제역 발병의 주범이 된 것이다. 2011년 1월 14일 국회는 ‘원 포인트’ 본회의를 열어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주 내용은 구제역 발병국 여행자들의 신고 의무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특히 축산 농민이나 종사자들이 외국을 여행할 때는 신고해야하고, 돌아와서도 소독과 방역 교육을 받아야하는 내용이었다.  

권 씨는 억울했다. 베트남이 구제역 발병국이긴 했지만 소, 돼지 농가는 근처에도 간 일이 없었다. 버스를 타거나 배를 타면서 관광을 하다, 저녁이면 호텔에서 보내는, 말 그대로 여행 일정이었다.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키우던 돼지들은 구제역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모두 살처분해야 했다. 그만큼 검역원의 역학관계 조사 발표는 엄중했다.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것은 구제역 발병의 최초 원인을 제공했다는 국민적인 빈축의 시선이었다.
소 구제역 확진 캡
7개월 전인 2010년 4월에는 인천 강화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애써 키운 소를 살 처분한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구제역도 김포를 거쳐 내륙에 상륙한 뒤 충남 청양, 충북 충주까지 확산됐다. 청양에서는 정부 산하 축산기술연구소에서도 구제역이 발생했다. 이때도 검역원은 강화 농장주들의 중국 여행 때문에 구제역이 발병했다고 중간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농민들은 억울했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수의 전문가들이 모인 국가 기관의 발표였다. 구제역 바이러스를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한 연구기관이자 동물 질병을 다루는 정부의 공식 기관이다. 하지만 농민들을 치명적인 전염병 매개자로 지목하면서 이와 관련된 과학적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다른 의견은 외국에서 제기됐다. OIE,즉 국제수역사무국 산하 표준연구소인 퍼브라이트 연구소의 2011년 1월 25일자 보고서다. OIE 180개 회원국들은 퍼브라이트 연구소에 자국에서 발생하는 구제역 바이러스의 시료를 채취해 보낸다. 변이를 막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보내야한다. 바이러스 종류를 분석하고 적절한 대처방안을 찾기 위해서다. 물론 세계적인 공조도 중요하다. 보고서는 한 달 안에 볼 수 있다. 바이러스와 백신의 효능을 분석한 이른바 R1값까지 계산해 제시한다. 구제역과 관련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라는데 이견을 다는 과학자는 없다.

보고서는 2010년 11월 한국 안동에서 발생한 구제역 바이러스는 같은 해 초 분리된 바이러스와 유사하다고 밝혔다. 7개월 전 강화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와 거의 같은 바이러스라는 소리다. 한마디로 강화 바이러스가 국내 잠복해있다 안동에서 재발했다는 것이다. 농장주들의 베트남 여행이 구제역을 옮겨왔다는 오해가 풀릴 수 있는 보고서였다. 같은 해 국회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과 검역원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수의과학검역원은 끝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사이 수의과학검역원은 농림축산검역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검역본부는 2013년 CDC,미국 질병관리센터에 주목할 만한 논문을 한편 제출했다.2010년~2011년 한국에서 발생한 구제역과 관련된 논문이다. 당시 구제역 방역을 담당했던 검역본부 주요 인사들이 모두 필자로 참여했다. 현재 주이석 농림축산검역본부장도 그 중 한 명이다.  

논문은 당시 구제역 바이러스는 11월 초 농민들이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것을 발병 원인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같은 페이지에  재미있는 내용이 계속된다. 2010년 안동에서 발생한 구제역 바이러스는 중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와 가장 비슷하다는 것이다. 베트남을 여행한 농민들 때문에 구제역 바이러스가 들어왔는데, 정작 국내 발생한 구제역 바이러스는 중국 것과 거의 같다는 것이다. 앞 뒤가 안 맞는 내용이다.

따져보면 현재 발병하고 있는 구제역 발병 형태는 2010년~2011년과 많은 점에서 닮았다. 2010년에는 봄에 발병했다 겨울에 재발했다. 2014년은 여름에 발병했다 겨울에 재발했다. 처음 바이러스는 세력이 미약했다. 잠시 소강상태를 거치면서 치명적인 힘을 비축했다. 변이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겨울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검역본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2010년 4월 강화의 구제역이 7개월 뒤 재발했다는 퍼브라이트 보고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직도 2010년~2011년 구제역 백서는 농민들의 베트남 여행을 구제역 발병 원인으로 적시하고 있다.
돼지 구제역 캡쳐_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전염병은 대개 그런 식이다. 소소한 발생이 있었을 때 방역에 더 철저해야했다. 하지만 추가 발생이 없는 것으로 만족했다. 날짜를 계산해 종료선언을 했다. 그 사이 학자들은 많은 경고를 했다. 바이러스는 피라미드와 같다고 했다. 최초 발생이 맨 위의 꼭지 점이라면 이미 바이러스는 꼭지 점 아래의 훨씬 더 넓은 지역에 이미 퍼져있다는 것이다. AI, 조류 인플루엔자도 마찬가지다. 방역 당국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방역을 제2의 국방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가축 방역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후진국이라는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물론 방역의 최우선 책임은 개별 농가에 있다. 하지만 개인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싶은 만큼  농민들도 소. 돼지를 지키고 싶어 한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백신을 제공하고 정확한 접종 방법을 알리는 책임은 국가에 있다. 무엇보다 농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그것이 소통이다. 하지만 매일 매일 책임만 더 지우고 있다. 과태료를 올리고, 발병시 살 처분 비용을 농가에 전담하게 한다는 지자체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축 방역은 역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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