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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말보다 음악으로…정명훈 감독의 즉흥연주

[취재파일] 말보다 음악으로…정명훈 감독의 즉흥연주
엊그제(19일)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의 신년 기자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서울시향 감독으로 부임한지 10년을 맞아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하는 자리였습니다. 지난해 말 시끄러웠던 박현정 전 대표 사태 이후 처음으로 취재진을 불러 모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정 감독은 자신이 부임한 뒤 지난 10년 동안 시향의 달라진 위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시향이 자타공인 아시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시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어디냐는 질문에 답은 여러 가지일 수 있겠으나, 정 감독이 부임한 뒤 서울시향의 실력과 명성이 급상승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어 정 감독은 시향이 '잘 하는 오케스트라'가 됐지만, 아직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되어야 하는 목표가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울시에 대한 불신을 나타냈습니다.

10년 전 처음 서울시향 예술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2008년까지 서울시향 전용 콘서트홀을 지어준다' 했었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며(서울시는 최근 세종로 공원 땅을 서울시향 전용 콘서트홀 부지 후보로 잠정 결정하고 막바지 검토 작업 중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3년 전부터는 시향의 예산이 계속 삭감되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시정될 거란 확약이 없이는 예술감독 재계약에 사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과도한 처우’ 논란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도 그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돈을 주는 건 '이 사람이 그만큼 일을 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그에 맞게 보수를 주는 것 아니겠느냐며, '왜 이렇게 많은 돈을 주느냐?’는 질문은 돈을 주는 사람에게 물어야지 자신에게 물을 질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자신은 ‘돈을 받은 만큼 일을 잘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만 답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돈을 받은 만큼 일을 잘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즉답은 없었지만, 그의 생각은 지난 10년 동안의 성과에 대한 앞선 발언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는 듯 보였습니다.

정 감독은 다만 자신은 그동안 프랑스나 일본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지만 어디서 돈을 더 받고 덜 받고 하지는 않았다며, ‘과도한 처우‘ 논란에 간접적으로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라고 반대로 묻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돈을 안 받고 일하면 논란이 해결되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정 감독은 자신이 요구한 재계약의 전제조건, 즉 전용 콘서트홀 건립과 적정 예산 등 지속적인 재정지원이 다 이뤄진다면 무료로도 일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요구하는 조건들에 대해 약속해주지 않으면서, 일단 ‘당신의 보수나 깎자’고 한다면 그건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정 감독의 간담회를 지켜보며 그의 억울함과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계약 당시의 말들은 감언에 불과했고, 이제 와서 자신을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몰아세운다는 느낌이 든다면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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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력가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오케스트라들과는 달리 서울시향은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됩니다. 그런 만큼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 대해서도 보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했습니다.

그의 잘잘못을 논할 문제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충돌처럼 느껴졌습니다. ‘성공한 한국인의 애국적이고 헌신적인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음악적 성취를 그에 '걸맞는 대우'를 통해 인정받고자 하는 한 예술가 사이의 간극이 작지 않아 보였습니다.

50분 남짓한 기자간담회를 마치며 그는 ‘지금까지 말로 다 설명을 했지만,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된다’며 답답함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대신해) 피아노 연주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서울시향 연습실 한쪽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슈만의 음악 두 곡을 즉석에서 연주했습니다. 10분 안팎의 즉흥연주가 끝나자 간담회장에 모인 취재진들 사이에서는 박수가 나왔고, 간담회 내내 굳어 있던 정 감독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며 즉흥 연주를 시작했지만 그의 선곡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아라베스크’였습니다. 분을 어쩌지 못해 선택한 곡이지만 격정적인 건 고사하고 지극히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곡들입니다. 예술가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방식은 이렇게 낭만적인 건가 봅니다. 다만 이제는 예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그의 팬들은 물론 시민들(혹은 그들의 대표자들)과도 조금 더 많은 대화를 나눠주길 기대해 봅니다. 

▶[생생영상] 정명훈 감독 "말로 표현할 길 없다"…즉흥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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